김현승, <가을의 향기> (시 수집 110)
<가을의 향기>, 김현승
남쪽에선
과수원의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1. 가을 시인, 김현승
김현승 시인은 1913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934년, 교지에 투고한 시인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이 양주동의 추천을 받아 <<동아일보>>에 당선되며 등단했죠. 일제강점기에 시 활동을 시작한 그는, 당시 식민지 치하에 대한 자신의 극복의지를 담은 시, 낭만주의적인 성향을 띠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에는 10년 간 절필을 하며 조국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지킨 분이기도 하죠.
이후 1957년, 그는 첫 시집 <<김현승시초>>를 발간합니다. 그리고 이후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등의 시집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해 오죠. 안타깝게도 60살이 지난 1975년,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맙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몸으로 겪었으며, 한편으로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시 세계에 영향을 미쳤죠.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어조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정의, 자연에 대한 감상 등 때로는 사회참여적인, 때로는 서정적인 시를 써 왔습니다.
특히 그는 가을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가을을 소재로 하여 그만의 비본질적 가치와 본질적 가치의 차이에 대한 감상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였죠. 이 시 <가을의 향기>는 그러한 시 중 대표적인 시로, 두 번째 시집 <<옹호자의 노래>>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집의 3부는 애초에 <가을에 관한 시편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시들 역시 가을과 관련된 시들로 이루어져 있죠.
2. 유한한 존재의 소멸
시의 배경은 가을입니다. 가을에는 과일이 익어서 떨어지기 시작하며, 낙엽은 지고, 풀은 말라 거름으로 돌아갑니다. 화려하게 피웠던 꽃들은 시드는 계절이죠. 쓸쓸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한 그러한 계절 가을. 김현승 시인은 이 가을을 통해서 '비본질적 가치와 본질적 가치'에 대해 생각합니다.
1~2연은 가을의 풍경에 대해서 묘사합니다. 잔잔한 어조와 말줄임표는 평온함을 넘어서 쓸쓸한 가을의 모습을 부각시킵니다. 능금나무의 열매인 잉금은 익고, 노을은 붉게 타고 있죠. 풀과 장미는 시들해져 갑니다. 여기서 임금, 마른풀, 장미는 모두 육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유한합니다. 화려하게 모습을 가꾸다가도 결국에는 지게 되어 있는 존재, 비본질적인 가치이죠.
3연에서의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이 역시 즉 유한하여 떠나가게 되는 육체적인 것들에 대해 시인이 말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떠나는 것은 위와 같은 소재들일 수도 있고, 확장하여 모든 유한한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다음 행의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다'라고 한 점으로 봐서, 떠나는 존재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 역시, 유한한 존재로 죽어서 썩게 되어 있기 때문이죠. 소중한 누군가가 떠나면 우리는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육체는 가지만 정신은 남아 있다
이렇게 1~3연을 통해 유한한 존재가 소멸하는 가을의 속성을 담담하게 말해낸 시인, 4연에서는 그러나 그러한 유한함에 감춰져 있던, 무한한 영원의 존재에 대해서 말합니다.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바로 무한한, 본질적인 가치인 것이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깁니다. 죽어서 육신은 썩지만, 한 번 남긴 이름은 영원히 남아있게 되죠. 그 이름이 영광스러운 이름이라면, 그것은 향기와 같습니다. 이러한 말을 시인은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결국 풍성한 향기의 이름처럼 영원히 남는 것들에 대한 고찰을 하고 있습니다. 비본질적(육체적, 유한한)인 것과 본질적(정신적, 무한한)인 것의 대조.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 가치와 같은 것들임을 전하고 있죠.
하늘은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높고 깊어서 웅장함이 깃든 하늘과 같은 것을 우리가 중요시하고 살아야 함을 강조하며 시는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김현승 시인은 자연에서 어떠한 내재적 가치를 찾아 표현했습니다. 단순히 자연풍경을 묘사하고 예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시죠.
♣ 개인적인 감상
가을이 오면 져가는 자연의 풍경을 보며 쓸쓸함을 느낍니다. 나 역시 같이 저물어가는 듯하죠. 내 삶은 유한하고, 하루가 지날수록 육신은 저물어갑니다. 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죠. 다만, 우리가 그럼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는 이 세상에 나의 이름 석 자를 어딘가에 영원히 남도록 새기기 위해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