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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시 수집 117)

알쓸수집가 2025. 5. 14.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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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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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수영 시인이 지금의 정치 상황을 지켜봤다면

참여시의 대표 주자 김수영 시인. 일찍이 세상을 떠나 그 안타까움이 더했던 김수영 시인은, 당대 독재 정권에 저항하고 민중의 계몽을 독려하는 참여시의 대표 주자입니다. 작년 말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팍팍한 삶을 사느라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어렵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미래의 정치 환경을 위해 올바른 목소리를 내야 할 때, 김수영 시인이라면 이 시를 읽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입니다.

 

 

2. 소시민적 행동에 대한 고백

시는 화자 자신에 대한 분개와 반성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나는 왜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자조적인 말로 시작합니다. 화자는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음에, 설렁탕집 주인에게 욕을 합니다. 삶의 기본적인 요소인 식과 관련된 분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 존재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와 같은 것에는 분개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합니다.

이런 상황은 비단 화자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자로서 살아가는 소시민이 인간으로서의 가치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현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모습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반복될 것임을 염려했을지 모릅니다.

 

3. 절정 위에 서있지 않는 나의 모습에 대한 반성

3,4연 역시 이러한 소시민적 자세에 대한 본인의 반성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이 반항하고 있는 일이 스펀지 만들기, 거즈 접는 일과 다름 없다고 하며, 자신의 저항의식은 일상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음을 고백합니다. 3연의 포로수용소 일화 역시, 극한의 외부상황에서도 저항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아비판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느낌표를 사용해가며, 자신의 독백을 절정으로 이끕니다. 자신의 반항적인 면이 절정에 있지 않다고 했지만, 마지막 느낌표를 통해서 오히려 '우리는 올바른 저항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강하게 전달합니다. 시인은 시를 통해, 자유를 억압하는 당대 정권에 대해 정면에서 저항하여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일상적이면서도 비속적인 언어를 같이 사용하면서, 일상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하게 해줍니다.

 

 

♠개인적인 감상평

지금의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일반 국민들이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쪽의 시각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다양한 시각에서 정치, 경제, 사회, 세계 등의 동향을 파악해야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팍팍한 삶속에서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만을 생각하기도 어려운 시기입니다. 하지만, 이럴수록 희망찬 미래를 그리기 위해 더욱 공부하고 더욱 계몽해야 한다는 것도 맞지요. 조금이나마 더욱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떠한 내용이든, 우리나라가 더 잘살기 위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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