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남편> (시 수집 28)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1. 문정희 시인에 대해
문정희 시인은 1947년 전남 보성 출생입니다. 진명여고에 재학 중에 첫 시집인 <<꽃숨>>을 발간했으며,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불면>과 <하늘>이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문정희 시인의 시는 낭만주의적 정신을 기본으로 하며, 청순한 감각과 언어로 드러났습니다. 가정적인 소재를 많이 사용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설화적/종교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시를 쓰기도 했죠. 그녀의 시 중 제가 뽑는 대표작은 <찬밥>입니다. 찬밥을 소재로 하여,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을 신과 같은 이미지로 그린 그녀의 대표적인 시죠.
다가오는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5월을 맞이하여 그녀가 쓴 가정적이면서도 웃긴 내용의 시를 하나 감상해 보죠. <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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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찬밥> (시 수집 1)
, 문정희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일 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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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세상 모든 남편에게 이 시를 바치지는 않고, 건네줍니다
이 시는 대한민국의 모든 아내라면 200% 공감할 것입니다. 시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남편에 대한 묘사, 그리고 그런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자세와 마음에 대한 시죠. 시의 언어는 간단명료하고 가벼운 맛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죠. 총 4연으로 구성된 이 시 역시 문정희 시인의 명료한 언어로 잘 표현된 시입니다.
남편이란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요? 가깝다고 하면 제일 가깝지만 멀다고 하면 멀기도 한, 그리고 때로는 가깝고 싶지 않지만 때로는 가장 가까웠으면 하는 존재이죠. 또 나와 피 하나 섞이지 않았지만, 나와 거리상으로도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는 사람입니다. 시의 1연에서는 그런 남편을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 정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나 오빠와 달리 피 하나 섞이지 않았지만 나한테 그만큼 가깝다는 의미죠. 아마 1위는 아버지, 2위가 남편, 3위가 오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2연에서는 시인의 재치있는 표현으로 웃음을 자아냅니다. 남편은 중요하든 사소하든 어떤 일이라도 제일 먼저 의논하고 싶은 존재죠.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멋있는 남자 주인공을 보면 괜히 옆의 남편과 비교하면서, 그 남자 주인공에 대한 동경과 애정의 말을 남편에게 내뱉기도 하는, 그런 애증의 관계입니다. 여기서의 가까우면서 멀다는 것은, 그만큼 터울 없이 지낼 수 있는 존재이지만 가장 많이 신경 써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가깝고도 멀다라는 두 단어가 어울리면서 남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명확한 이미지를 심어줍니다.
3연에서는 남편의 아이에 대한 사랑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수라는 표현, 모든 아내분들이 남펴에게 일주일에 몇 번은 하는 말이죠. 하지만 그래도 자식들을 끔찍히 아끼고 살피는 남편. 그런 남편을 보며 웃음 반 한숨 반으로 남편을 챙기러 다닐 것입니다.
마지막 4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많이 밥을 먹고, 가장 많이 전쟁을 치른 존재죠. 전쟁을 치르지만 그래도 내 남편은 내 남편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아마 화자는 전쟁을 치르면서도 남편과 함께 먹을 다음 끼니로 무엇이 좋을까를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시는 일상적인 언어로 남편을 다양한 이미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남편을 찬양하거나 비난하기만 하는 시가 아닙니다. 좋은 점 나쁜 점 모두 내 남편을 이루고 있는 점이죠. 그렇기에 시인은 한 연에서 좋은 상황/나쁜 상황을 같이 드러내면서 나와 일상을 함께하는 남편 그 자체에 대해서 이미지를 그릴 수 있도록 합니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결국 희노애락을 같이 하며 지내는 소중한 존재임을 이 시를 읽고 느낄 수 있는 점은 그러한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그려지면서도 결국 남편의 소중함과 웃음을 주는 이미지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 개인적인 감상
부부는 애증의 관계라고 하죠. 저는 부부 하면 남편이 짓궂은 장난을 하고 아내는 질색을 하면서 꾸지람 한 바가지를 주는 그런 그림이 종종 떠오릅니다. 때로는 다툼도 많고 엄청난 싸움으로 커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화해하고 일상을 같이 살아가죠.
이 시를 읽고 공감하는 아내 분들이라면 아마 '그래도 행복함도 많은 결혼 생활을 하고 있구나' 하는 감정을 느끼리라고 생각합니다. 남편 분이라면 이 시를 읽고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 먼 사이보다는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가 되도록 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