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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모아 시

문정희, <찬밥> (시 수집 1)

by 알쓸수집가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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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밥>, 문정희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일 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우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오늘의 시는 문정희 시인의 <찬밥>입니다. 이 시는 문정희 시인의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2004)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1연 19행으로 이루어진 시로, 우리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회고적인 시입니다.

 

1~2행에서는 화자가 아픈 몸을 이끌고 찬밥을 먹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이 상황에서 가족들의 밥을 챙기고 정작 본인은 찬밥을 먹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머니는 남은 무우(*시적 허용) 조각, 생선 가시에 붙은 살점을 찬밥과 함께 먹습니다. 화자는 그런 어머니의 손을 그리워하며, 찬밥을 먹습니다. 그런 어머니는 '신 대신 보낸 존재'라고 칭해져, 신과 동일시되기까지 합니다. 마지막 행에서 스스로를 '세상의 찬밥'이 되었다고 인식하며, 화자 또한 어머니와 동일시하게 됩니다.

읽는 이에 따라서는 어머니가 마치 예수와 같은 신적인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시는, 찬밥이라는 소재를 통해 어머니라는 고귀한 존재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문정희 시인 특유의 문체, 그리고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이라는 행을 통해 마치 어머니를 세상 사람들을 구원한 예수처럼 느껴지게 만든 시입니다. 

 

 

개인적인 감상

이 시를 고등학교 문제집에서 보았습니다. 그때 이 시를 읽고 저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날 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을 못마땅해 다투고 나와서였을까요. 이 시는 '어머니는 따뜻한 밥을 내어주고 찬밥을 먹는, 나를 지켜주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신이다'라는 주제를 상기시켜주는 시입니다. 회고적인 문체를 통해 어머니를 신격화하고 있으면서도 내용에는 읽는 이들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찬밥'이라는 소재를 사용했죠. 어머니의 찬밥을 먹는 모습을 대수롭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 대다수일 텐데, 그런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이 시를 알게 된 후에는 어머니가 찬밥을 먹는 것을 애써 말렸습니다. 지금도 찬밥을 드시지만, 찬밥을 먹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남은 밥을 버리기 아까워하는 절약 정신', '따뜻한 밥은 남편과 자식들을 챙겨주려는 사랑', '고달픈 일과를 끝내고도 찬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애달픔'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떠오릅니다. 화자가 몸이 아플 때 찬밥을 먹는다는 상황은, 찬밥을 먹는 어머니의 고달픈 모습을 몸이 안 좋은 화자의 모습에서 떠오르게 하기 위한 장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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