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 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1. 문정희 시인의 <남편>과 같이 읽으면 좋은 시
이 시는 문정희 시인이 가정을 소재로 하여 쓴 시 중 하나입니다. 아래의 시 <남편>과 같이 읽어도 재미있는 그런 시로, 부부의 애증에 대해서 문정희 시인 특유의 언어로 잘 표현하고 있죠.
https://c-knowledge.tistory.com/61
문정희, <남편> (시 수집 28)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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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란 어떤 관계일까요? 희만 있지는 않죠. 노도 있고, 애도 있고, 그 외 다양한 감정들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결국 나중에 남는 것은 서로 맞잡은 손입니다. 이를 생각하며 감상해 보면 어떨까요?
2. 부부의 일상을 노래한 시
이 시는 7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소 긴 시입니다. 크게 ①부부가 공유하는 일상과 ②부부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 서술하는 부분으로 나뉘죠. 1~3연은 부부가 어떤 관계인지를 부부의 일상으로 나타냅니다. 결혼하고 난 뒤 같이 하는 일상에 무뎌진 부부는 몸을 껴안는 사이보다는 시원함을 위해 몸을 멀리하는 것이 더 좋은 사이입니다. 하지만, 모기 소리가 울리면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모기를 탁 잡아내는 환상의 팀워크를 선사하죠. 부부란 이런 관계가 아닐까요? 멀리 떨어져 있고 큰 표현을 하지 않아도, 항상 마음 속에서는 상대방을 생각하고 있고 서로의 힘이 필요할 때면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그런 관계죠.
2, 3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애 때와 달리 서스럼 없이 치마를 걷는 아내, 그리고 배꼽에 연고를 바르며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생각하는 남편. 그만큼 서스럼 없이 대할 수 있으면서도 연고를 바른다는 행위에서 서로를 위해 섬세함을 갖추고 대하는 관계. 연고를 발라주는 일상의 모습을 통해서 시인의 부부란 무엇인지를 재치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부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비유를 들어 표현합니다. 1~3연의 일상에서 알 수 있듯이, 결혼은 사랑을 무뎌지게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이 잘 드러나지 않죠. 하지만 시인은 부부란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라고 표현합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사랑은 무뎌지지 부부의 서로에 대한 소중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부가 지내온 오랜 시간이 풀꽃 더미라는 추억이 되어서, 아름답게 남게 되죠. 시인은 이를 풍경이라고 칭하여, 부부의 일생을 한 폭의 아름다운 경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서로 묶여 있습니다. 서류상으로도 묶여 있고, 물리적으로도 묶여 있고, 마음상으로도 묶여 있죠. 그래서 때로는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도 다시 가까이에 있게 됩니다. 하지만 무엇으로 묶여 있는지와 상관 없이, 그 묶임을 억지로 영영 풀어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서로 같이 나의 자식들을 바라보는 그런 것이 중요합니다.
부부는 생의 마지막까지 이어져 있는 관계입니다. 다 늙으면 자식도 없고 남는 것은 내 남편 혹은 아내뿐이죠. 남은 것은 상대를 잡고 있는 내 손, 그리고 그것을 놓지 않는 상대의 손입니다. 늙어서 아무것도 없고 죽음을 기다리는 쓸쓸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상대가 있어서 이 모습 역시 쓸쓸하게만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일생의 마지막까지 그려냄으로서 부부란 관계가 단순히 어떤 한 순간을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 전반을 같이 있으면서 삶 자체를 공유하는 그런 운명적인 사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 개인적인 의견
부부란 한마디로 정의하기 참으로 어렵죠. 사랑이 있지만 정열적이진 않고, 서로를 너무 잘 알지만 이해를 못할 때가 더 많고, 그럼에도 다음날 다시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이 관계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아니, 표현할 수 없는 이 자체가 부부라는 관계 아닐까요? 이러한 모습 모두가 부부임을 나타내는 그런 모습이기에 부부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한쌍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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