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 조지훈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항촉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1. 청록파 시인, 조지훈 시인의 대표작
조지훈 시인은 <<청록집>>을 발간한 청록파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박목월, 박두진 시인과 함께 발간한 <<청록집>>에도 수록된 <승무>는 원래는 1939년 12월호 <<문장>>에 발표된 시입니다.
조지훈 시인의 시는 특히 '고전적인 미'를 잘 담아냈습니다. 한국적 감상이 짙은 시어와, 시적 허용을 통한 여운, 전통적인 운율감을 통해서 '한국의 고전적인 미'를 잘 드러냈죠. 그의 대표적인 시 <승무>는 이런 그의 시 경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로, 여승의 춤추는 모습과 춤을 소재로 한 아름다운 시입니다.
또한 그의 시는 소재와 고전적인 미 때문인지 불교적 색채를 띄는 경우도 많습니다. 승무는 한국의 민속 무용이면서도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독무입니다. 그렇기에 시 전반에 걸쳐서 불교적인 색채가 강합니다. 과연 시의 분위기는 어떤지를 살펴보죠.
https://c-knowledge.tistory.com/50
조지훈, <낙화> (시 수집 18)
,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
c-knowledge.tistory.com
2.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시는 9연 18행으로, 1연이 2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승무를 추는 배경이 나오고, 승무의 동작 변화가 나오면서 감정이 고조되고, 결말에 이르러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그런 구조입니다.
중간중간에는 '하이얀, 감추오고, 모두오고, 감기우고' 등의 시적 허용이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얇은 사, 외씨보선, 삼경, 박사 고깔' 등은 승무와 관련된 고전적인 표현들이면서 불교적 색채를 느끼게 해 주는 표현들이죠. 마지막으로 4음보 율격과 수미상관 구조를 통해서 하나의 통일된 안정적 분위기, 즉 고전적인 미학을 유지하고 있는 고요하지만 큰 울림이 있는 시입니다.
1~2연에서는 승무의 동작과 여승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그런데 승무를 추는 그녀는 3연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승무란 번뇌를 다스리고 불심을 생각하기 위한 춤사위입니다. 여기서의 눈물은 세속적인 번뇌로 인한 눈물일 것입니다. 일반적인 춤을 추며 눈물을 흘릴 일은 없겠지만, 승무는 종교적 승화를 위한 하나의 의식이기도 하기에, 여승의 춤사위는 일반적인 춤이 아닌 하나의 신성한 의식으로서 비춰지기 시작합니다. 이 변화는 감정의 고조를 이끌어 냅니다.
4연에서는 시간의 경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이 짙어지고 그 어둠 속에서 하이얀 고깔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여승의 춤사위는 더욱 강렬해지죠. 그것이 5연에서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라는 시각적인 묘사로 드러납니다. 어둠 속 밝음이라는 대비가 여승의 춤사위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죠. 춤사위 자체 역시 더욱 역동적으로 진행되는데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 그 부분입니다.
5연에서는 동적인 이미지에서 정적인 이미지로 전환합니다. 절정에 이르러서 동작을 멈추고 까만 눈동자로 별을 바라보는 여승의 모습은, 불교적 해탈과 번뇌의 승화를 이루어가는 한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신성한 한국의 고전적인 의식이 이렇게 절정을 맞이하고, 이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시인은 이를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이라는 예스럽고 아름다운 묘사로 그렸습니다.
뒤이어 여승은 다시 돌아가 춤사위를 시작합니다.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을 한다는 모습에서,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을 이룬 모습이 떠오릅니다. 시간은 지나고 지나 삼경이 되고, 다시 하이얀 고깔이 나빌레는 모습으로 시는 끝납니다.
이 시는 여승이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여승의 춤사위와 의상의 움직임이 어우러진 달밤의 산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조지훈 시인은 이 모습을 신성한 고전적 의식으로 감상하고, 그 모습을 섬세한 언어로 그려냈습니다. 많은 시적 허용을 사용한 것도 승무라는 동작이 주는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감정이 이입되거나 관조적인 자세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승무에 집중하여 영탄하다가도, 다시 동작 자체에 집중하는 모습을 통해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죠.
♣ 개인적인 감상
참으로 아름다운 여승의 모습입니다. 달밤에 나빌레는 밝은 무언가. 그것이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아름다운 발버둥이라니, 숨죽이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한국의 고전적인 미가 잊히어 가는 것을 조지훈 시인은 어쩌면 아쉬워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정서가 강제로 말살되던 시기였으니, 이러한 고전적인 미를 살리는 것은 시인으로서 꼭 해야 했던, 시대가 준 필연적인 역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아모아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석정, <오월이 돌아오면> (시 수집 33) (0) | 2023.04.30 |
---|---|
천상병, <5월의 신록> (시 수집 32) (0) | 2023.04.29 |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게로> (시 수집 30) (1) | 2023.04.25 |
문정희, <부부> (시 수집 29) (1) | 2023.04.22 |
문정희, <남편> (시 수집 28) (0) | 2023.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