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배를 밀며> (시 수집 40)
<배를 밀며>,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힘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1. 연작시, <배를 매며>, <배를 밀며>, <마당에 배를 매다>의 두 번째 시
장석남 시인의 시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시는 이 연작시 중 첫 번째 시, <배를 매며>입니다. <배를 매며>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사랑을 밧줄로 배를 매는 행위로 표현하여 사랑의 속성을 예쁘게 노래한 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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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천천히 다가오고, 나는 운명처럼 그 배를 받아들이며 밧줄로 배를 연결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어 인연으로 맺어지는 거죠. 하지만 사랑에는 이별이 항상 존재합니다. 사랑이 배를 매는 거였다면, 이별은 밧줄을 풀고 배를 멀리 떠나보내는 것에 해당할 것입니다. 장석남 시인의 연작시 두 번째, <배를 밀며>를 감상해보죠.
2. 배를 미는 건 이별의 순간
이 시는 <배를 매며>와 마찬가지로, 2001년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에 실린 시입니다. 총 5연 16행으로 이루어진 시로, 전체적인 시의 느낌은 <배를 매며>와 유사합니다. 하지만 말하고 있는 것은 전혀 반대이죠. <배를 매며>는 사랑의 순간, <배를 밀며>는 이별의 순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배를 미는 순간, 그것이 이별의 순간이죠.
1연에서는 그런 이별의 순간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면 이별이 있지만, 이별을 드문 경험이라고 말한 것은 그만큼 이별이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결말이고, 가장 피하려고 했던 결말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화자가 배를 미는 공간은 한 허공입니다. <배를 매며>에서는 주위가 빛, 구름 등으로 가득했지만 <배를 밀며>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입니다. 이는 이별하는 상황의 공허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공허한 마음 속에서 이별을 결심했기 때문에 있는 힘을 한껏 더해 밀죠. 이것이 6행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손이 배에서 떨어진 순간, 손은 환해집니다. 이는 이별 후의 홀가분한 감정을 나타냅니다.
2~3연에서는 이별의 속성을 배를 미는 행위에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떠나는 것이 마치 배가 부드럽게 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죠. 부드럽지만 점차 배가 멀어지듯, 사랑이란 감정이 점점 멀어지고 그렇게 이별은 찾아옵니다. 또한 이별을 한 번 결심하면, 강하게 마음을 가지죠. 3연에서 배를 세게 미는 것이 바로 이러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3. 하지만 그리움은 남아있다
강하게 마음을 먹고 힘껏 배를 밀었습니다. 그리고 홀가분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별이 그렇게 쉬우면 이별의 고통에 몸무림치는 우리도 없겠지요. 이별은 일단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4연에서의 '물 위의 흉터'가 그것이죠. 배가 만들어낸 물결 자국을 상처로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5연에 이르러서는 '배가 다시 밀려들어옵니다'. 이는 이별을 하여 배를 떠나보냈지만, 그리움이 아직 남아 완전히 사랑을 떨치지는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강하게 마음을 먹고, 이별을 결심해도 마음 한켠에서는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의 기억, 좋았던 추억들, 미련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오랜 시간 마음에 남아 갑자기 울컥울컥 솟구칩니다. 시인은 이러한 감정을 '아무 소리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라는 표현을 통해서 하며 '이별은 그리움을 남긴다'라는 메시지를 마지막에 같이 던졌습니다.
♣ 개인적인 의견
저는 이 시가 이별의 속성을 표현한 것도 좋지만, 마지막 연에서의 '남아있는 그리움이 갑자기 찾아오는 상황'에 대한 표현이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배를 힘껏 밀었지만 배는 때로 다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파도에 의해 뒤로 돌아오기도 하죠. 그 배를 다시 밀어도, 파도가 지속되는 한 배는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파도가 요동치는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요. 평온해 보이지만 격동을 감추고 있는 바다, 그리고 그 위에서 떠다니는 배. 우리의 마음과 사랑을 참으로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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