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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수선화에게> (시 수집 8)

알쓸수집가 2023. 3. 18.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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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이번에 소개할 시는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1950년 경남 하동 출생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하면 제일 먼저 '사랑', '희망'과 동시에 '외로움'이 떠오릅니다. 그의 대표적인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서 엿볼 수 있듯, 시인은 '외로운 존재'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는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경제적/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했고, 그들에 대한 애정을 끊임없이 표현해 왔습니다. 그의 시를 읽으며 눈물이 나는 이유는, 그의 시가 '현대를 힘들게 살아가면서 정작 고독함과 외로움에 빠져 있는 우리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대고 한마디 위로를 주는' 시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는 분명 따뜻한 감정을 주지만 그것은 '희망', '사랑'보다는 '위로'에 가깝습니다.

 

<수선화에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 역시, 주 소재는 '외로움'입니다. 총 7번이나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하며, 그렇지 않다고 해도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는' 장면은 충분히 쓸쓸하고 외로운 상황임을 느낄 수 있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울지 마라'라는 아주 단정적이면서 직접적인 말을 첫 행부터 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강한 말이지만 '나약하게 울고 있는 사람을 일깨워주는 한마디'로 손색이 없습니다. 

 

위로에는 따뜻한 말로 전하는 위로도 있지만, 듣는 이의 마음을 다잡게 하는 강한 말투의 위로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러한한마디가 포장된 열마디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할 때도 있죠. 

 

이 시가 제목으로 '수선화'를 사용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수선화'의 꽃말, 그리고 그리스 신화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 사랑, 고결, 신비, 자존심'입니다. 가냘픈 존재이지만 아름답게 자신을 피워서 자신의 길을 걷는 수선화가 '척박한 현실에서 힘들게 살아가지만 그 자체로도 고결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 우리들'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수선화'와 관련된 일화가 존재합니다. 물의 신 케피소스와 님프 레리오페의 아들인 '나르시스'는 미청년으로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도취되다가 결국 물에 빠져서 그는 죽게 되었는데요. 그 자리에서 '수선화'로 다시 피어났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시인은 여기서 모티브를 얻어 수선화가 자기 사랑과 동시에 쓸쓸함, 외로움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감상

<수선화에게>는 읽다 보면 왜 '수선화'를 제목으로 사용했을까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듭니다. 하지만 위의 꽃말과 일화를 살펴보면, <수선화에게>라는 제목은 '외로움'과 '위로, 사랑'을 동시에 담는 아주 아름다운 제목임을 알 수 있죠.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 얽힌 이러한 신화들과, 수선화의 자태를 보면서 수선화에게서 '위태롭게 하루를 보내는 우리들의 외로운 모습', 그리고 '그렇지만 우리의 얼굴과 마음에 항상 존재하는 자기애와 고결함'을 발견한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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