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가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1. 담쟁이에 담긴 중꺾마 정신
도종환 시인은 쉬운 언어로 강한 울림을 주는 시를 많이 써 왔습니다. 그 울림은 우리에게 때로는 큰 힘이 되어 주기도 했죠. 그의 대표작 <흔들리며 피는 꽃>은 쉬운 언어로 읽는 독자에게 큰 힘을 복돋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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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시 수집 36)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곱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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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흔들리며 피는 꽃>과 함께, 도종환 시인의 중꺾마 정신이 잘 드러나는 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담쟁이>입니다.
2.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담쟁이는 벽을 넘는 선구자
이 시의 주 소재는 담쟁이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담쟁이 덩굴. 수두룩하게 자란 모습이 사실 나무나 꽃에 비해서는 외관상 좋아 보이지 않죠. 꽂꽂하게 자라지 않고 어떤 물체를 넘으면서 자라는 식물이기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이 담쟁이에서 '자신의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끝내 장애물을 넘어가는 꺾이지 않는 정신'을 찾았습니다.
벽에 가로막힌 우리. 우리는 그 앞에서 좌절하고 있습니다. 그때 담쟁이가 말없이 우리 옆으로 다가옵니다. 보잘것없는 담쟁이라고 다를 게 뭐 있을까 하는 절망에 빠진 우리 앞에서, 담쟁이는 보란 듯이 벽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담쟁이가 벽을 넘을 수 있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구불구불 몸을 꺾으면서 벽을 탈 수 있으며 그것을 지탱하는 줄기와 뿌리, 그리고 벽에 쉽게 달라 붙을 수 있도록 거친 표면 등 여러 요소 덕에 가능하죠.
우리가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그 담쟁이가 우리의 앞에서 벽을 오르고 있습니다. 편견에 휩싸여 담쟁이의 힘을 보지 못했습니다. 담쟁이는 그렇다고 우리를 비웃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그저 말없이, 천천히 벽을 오릅니다. 그리고 뒤이어,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갈 수 있도록 우리를 끌어올리기 시작합니다.
3. 도종환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푸른 정신
'초록'은 자유, 평화 등 초월적인 가치 혹은 자유를 상징하는 색깔로 종종 쓰입니다. 또한 근대화 시기에는 '민중'을 대변하는 색이기도 했죠. 도종환 시인은 초록으로 가득한 담쟁이가 우리를 이끌고 벽을 넘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우리에게 '꺾이지 않고 벽을 넘는 푸른 정신을 가져라'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담쟁이는 벽을 넘어서 절망을 다 덮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마지막에서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라고 말을 합니다. 이는 선구자 역할을 한 담쟁이를 시작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의 담쟁이가 되어 벽을 넘는 그러한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이를 통해서 담쟁이는 '희망과 용기를 복돋아주는 선구자'로 그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는 이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투박한 언어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그 안의 메시지는 아주 강한 울림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쉽기에 더 공감되고, 투박하기에 더 세게 때리는 그런 시이죠. 이 <담쟁이> 역시 도종환 시인의 시 세계를 아주 잘 보여주는, 그런 시입니다.
♣개인적인 감상
벽 앞에서 좌절할 때가 요새는 많은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 마주친 업무의 벽부터, 보이지 않는 미래를 가로막는 벽까지.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벽이 내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벽 앞에서 좌절만 하면 우리는 그대로 끝인 셈이겠지요. 실패하더라도 벽을 넘거나, 부수거나, 돌아가는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아나요, 그 벽이 알고 보니 내 키보다 딱 1cm만 큰, 내가 조금만 점프하면 넘을 수 있는 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눈앞에 벽이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좌절한 나머지, 고개를 살짝 들어 벽의 실제 높이를 바라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인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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