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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모아 시

이성복, <꽃 피는 시절> (시 수집 102)

by 알쓸수집가 2023.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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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시절>,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 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회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아득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1. 이성복 시인에 대해

이성복 시인은 19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77년 <<문학과지성>>에 대표작이기도 한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죠. 대표적인 시 문학상 중 하나인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한국 시 문학사에서 독창적인 입지를 다진 그는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 <<남해금산>>(1987) 등의 시집을 출간했습니다.

 

이성복 시인은 쉬우면서도 섬세한 언어로 우리 시대가 가진 정신적인 위기를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언어 파괴의 실험적인 시도 선보이는 등, 다양한 시 세계를 보여주었죠. 그중 이 <꽃피는 시절>은 세 번째 시집인 <<그 여름의 끝>>(1990)에 실린 작품입니다. 쉬우면서도 섬세한 언어로 꽃이 피어 떠나가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죠.

 

저는 이 시를 읽으면 꽃과 나무의 관계뿐 아니라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왜 그런지 시를 한 번 감상해 보죠.

 

 

2. 꽃과 나무, 나와 당신

이 시는 꽃이 피어나서 나무와 이별을 하는 모습까지를 그리면서 이를 나와 당신에 빗대어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에서의 꽃을 품고 있는 외피나 줄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당신나의 고통을 뒤로하고 찬란하게 피어나는 꽃이죠. 당신(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꽃)은 귀먹고 눈이 멀었습니다. 아마 아직 피어나지 않았기에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일 겁니다. 나는 언젠가 내 몸에서 피울 꽃에 대해서 알고 있죠. 나무와 꽃은 이렇게 이어져 있습니다.

 

2연을 통해 꽃이 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그려집니다. 부르지 않아도 계절이 바뀌면 꽃은 항상 그 자리에서 피어납니다. 당신이 온다는 것, 이는 즉 '개화'를 의미하죠. 생각하지 않고 꿈꾸지 않아도 온다는 표현을 통해서 시인은 '당신'과 '나'의 만남이 운명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만남은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들게 만들 정도로 놀랍고 신비로우면서도 경외감이 들게 합니다. 자연의 섭리란 그렇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참으로 놀라운 광경의 연속이죠. 

 

 

3. 나의 고통 속에서 당신은 피어난다

꽃이 피어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외피를 뚫고 나와야 하는 꽃은 몸부림쳐야 하며, 이 고통을 나무는 감내해야 하죠. 이것이 바로 3연에서 드러납니다.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치는 꽃, 아직 나(나무)의 안에 있기에 나오고 싶어하는 꽃의 강한 의지. 하지만 꽃이 발버둥을 칠수록 나(나무)는 당신(꽃)과의 이별을 생각해야 합니다.

 

꽃이 피어나 나에게서 떠날 때, 나는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4연에서 목이 갈라지고 실핏줄이 터지는 것, 갈가리 찢어지는 것 모두가 이러한 꽃의 탄생을 위한 고통이죠. 그리고 이 고통의 끝에서 꽃은 만개하고, 그렇게 나와 이별합니다.

 

찬란한 당신(꽃)의 모습을 보면 드는 감정을 어찌 하나로 말할 수 있을까요. 아름다움, 행복, 이별로 인한 슬픔, 나의 고통과 그 흔적 등 모든 감정들이 교차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필 때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은' 것이죠.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리고 결국 나는 당신을 보낼 일이 아득하고 당신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이별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시는 마무리됩니다.

 

 

4. 부모의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이 아닐까

이 시를 꽃과 나무, 사랑하는 연인 사이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저는 이 시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의 몸속에서 존재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그 시작 전부터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자식이 배 속에서 자랄 때마다 엄마는 고통이 심해지죠. 이후 출산을 할 때 아이가 엄마의 몸에서 나올 때의 고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입니다. 꽃과 나무를 이 출산까지의 부모-자식 관계로 볼 수도 있죠.

 

한편 출산 이후 자식이 독립하기까지로 볼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자라 꽃을 피우기까지는 부모의 많은 인내와 고통이 뒤따릅니다. 자식을 위해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자기 몸은 못 챙겨도 자식은 하나라도 더 챙기려 하고, 그렇게 자식이 혼자서도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 때까지 자식을 지킵니다. 자식이 꽃을 피워도 부모는 쉽사리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떠나보낸 뒤에도 항상 걱정하며 시간을 보내죠. 

 

이러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이 시에는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꽃 피는 시절은 1년 중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시기죠. 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자식이 꽃을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모습.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일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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