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1. 기형도 시인에 대해
기형도 시인은 1960년 옹진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은 아버지 덕분에 유복했지만, 아버지가 쓰러지고 몇 년 뒤인 1975년, 누나마저 사망하면서 시련을 겪습니다. 이때 기형도 시인은 시를 쓰기 시작했죠. 연세대에 입학한 뒤에 원래는 정법대에 다녔지만 문학 수업을 들으면서 시 활동을 활발하게 합니다. 이후 1981년, <사강리> 등을 발표했죠. 이후 시 활동을 활발하게 하며 첫 시집 발간을 준비했지만, 29세의 나이인 1989년에 요절하게 됩니다.
유복했지만 아픈 아버지와 함께 기울었던 가세, 아버지를 대신하여 생계를 꾸려나간 어머니,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누나 등 그의 어린 시절은 시련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러한 유년시절의 영향과 당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시 전반에 작용하고 있는 감정은 '우울'입니다.
기형도 시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빈집> 역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비어 있는 집에서 느낄 수 있는 쓸쓸함과 비애가 담겨 있죠. 시를 감상해 볼까요?
2. 사랑을 잃은 나의 마음은 텅텅 비었다
시는 크게 3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랑을 잃은 후의 공허한 마음과 비애를 '빈집'에 비유하여 서술하고 있는 시죠. 사랑을 하면 우리의 마음은 사랑으로 인해 풍성해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렇게 쓸쓸하고 공허할 수가 없죠. 시인은 이러한 사랑 상실의 상황을 빈집에 빗대고 있습니다. 집은 사람이 들어와서 살아야 따뜻하고 풍성하지만, 사람이 없는 빈 집은 공허하고 스산한 느낌만 줄 뿐이죠.
1연 1행은 현재 상황이 나타납니다. 사랑을 잃은 상황입니다. 2연으로 넘어 가면, 사랑을 품었던 얼마 전에 대한 회상, 그리고 사랑을 놓아야 하는 것에 대한 쓸쓸함이 나타납니다. '아'라는 영탄적인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인해 시의 쓸쓸함은 배가 됩니다.
짧았지만 그만큼 사랑으로 가득했던 때를 '짧았던 밤'이라고 표현한 시인. 뒤이어 작별을 고하는 대상이 열거됩니다. 겨울 안개, 촛불, 흰 종이, 눈물이 그것들이죠. 각각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겨울 안개 : 사랑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에서 오는 불안감, 방황
촛불 : 화자의 가슴을 밝혀주면서도 쉽게 꺼질 수 있는 위태로운 사랑의 모습
흰 종이 : 상대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매개체
눈물 :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지 못해 망설이며 흘렸던 것
이 모두는 결국 '사랑' 때문에 의미가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울고, 때로는 불안해하는 것 역시 사랑의 속성이죠. 하지만 화자는 사랑을 잃었습니다. 결국 위와 같은 것들도 이제는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거죠.
이를 2연의 마지막에서 작별을 고하면서 떠나보내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러한 대상을 '열망'이라는 뜨거운 단어로 표현하여, 차갑게 식고 쓸쓸해진 자신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3. 이제 마음의 문을 잠근다
사랑을 잃은 화자는 이제 마음의 문을 잠급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빈 집으로 마음을 만드는 것이죠. '장님'이라는 말은 사랑을 잃어버려 앞이 보이지 않는 화자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장님은 더듬거려 문을 잠급니다. 세상에 절망한 듯, 소통하고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빈 집,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은 한때의 온기와 추억뿐입니다. 이를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고 표현하며, 시는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이 시는 '~아', '~네'와 같은 영탄적 어조로 사랑을 잃은 화자의 비애와 상실감을 드러내며, 사랑과의 작별을 고하는 하나의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빈집>은 쓸쓸함으로 가득한, 그런 집입니다.
♣개인적인 감상
시대가 변해도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은 항상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과거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몇십 년이 지났지만, 사랑을 잃은 후의 쓸쓸함에 대해서 이 시를 읽으면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모두가 느낄 수 있는 슬픈 이별의 감정. 쓸쓸하지만, 그렇기에 이 시가 지금까지 우리의 옆에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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