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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모아 시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 수집 9)

by 알쓸수집가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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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1. 백석 시인에 대해

'백석'은 필명입니다. 본명은 '백기행'이지만, 우리는 필명 '백석'으로 그를 기억합니다. 평안북도 정주 출생이었으며 6.25 이후 북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시는 근대화가 진행되고 북한 소속 작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야 많이 알려지게 되었죠. 백석 시인을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시인으로 알고 있기도 했지만, 실은 1996년까지 살아 계셨습니다. 다만 북한의 독재와 사상 주입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창작 활동을 하지 않고 지내셨죠.

 

백석 시인은 한국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친 시인입니다. 평안 출생이지만 남북의 여러 지역들을 드나들면서 특정한 지역의 언어에 갇히지 않았고 한국어가 가진 미를 시에 잘 녹였습니다. 백석 시인의 시에서는 오감을 사용한 표현들이 굉장히 많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어 특유의 운율감과 조화를 이루어 더 강한 자극으로 전달됩니다.

 

또한 그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시와 달리, 어떠한 이야기 구조를 갖춘 서사시의 경향이 잘 드러납니다. 이번에 소개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 <나와 나타냐와 흰 당나귀>

이 시는 백석이 비교적 초기에 발표했던 시입니다. 이 시 역시, 서사시의 경향을 띄고 있습니다. 큰 이야기는 나타샤와 나의 사랑이지만, 시간과 장소의 전환, 눈 내린 풍경이라는 뚜렷한 배경, 나타샤와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감정 변화 등을 바탕으로 어떠한 이야기를 쓰듯이 써 내려갔습니다.

 

이 시의 백미는 첫 연입니다.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기 때문에 눈이 내린다'는 표현은,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내용들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나타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극대화합니다. 나타샤에 대한 사랑은 눈도 내리게 함을, 그리고 나의 현실이 가난하고 궁핍하기 때문에 나타샤에 대한 사랑이 더 애절스러움을 잘 드러내고 있는 연이죠.

 

두 번째 연에서는 화자의 현재 쓸쓸한 상황과 나타샤와 함께 떠나는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 겹쳐지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깊은 산골은 세상과 단절된 곳이지만 나타샤와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곳을 아는 건 어떤 사람이 아니라 흰 당나귀죠. 또한 눈이 내리기 때문에 그들의 흔적조차 다시 묻힐 것입니다.

 

세 번째 연에서는 나타샤가 나에게 올 것임을 확신하고 세상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화자의 의지가 잘 드러나는 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는 '당나귀가 응앙응앙 운다'라는 말을 통해서 나타샤와의 행복한 사랑을 언어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응앙응앙'은 나타샤와 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의 울음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눈이 푹푹 내린다'는 점입니다. 눈은 화자의 순수함, 그리고 때묻지 않은 사랑, 자신의 의지를 표현합니다. 그 눈이 점점 짙게 내린다는 것은 주위와 단절된 채 오로지 나타샤와 함께 나만의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열망감을 나타내죠. 또한 '눈은 푹푹 나리고', '사랑은 하고' 등의 표현 역시 '이' 대신 '은'이라는 보조사를 사용한 것도 특징입니다.

 

개인적인 감상

이 시는 길상사를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여인 자야와 백석의 사랑 이야기로도 알려진 시입니다. 백석은 미남이었던 만큼 많은 여인들과의 사랑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으로 자야라는 사람이 있죠. 백석은 기생으로 활동했던 자야를 보고 한눈에 반해 사랑했습니다. 그는 자야와 하룻밤을 같이 한 뒤, 자야에게 같이 가자고 청했죠. 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백석은 머릿말에 이 시를 남기고 떠납니다.

 

훗날 자야는 길상사를 위해 그녀의 땅을 모두 기증했습니다. 이를 아깝지 않냐고 물었던 한 기자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깟 것 그의 시 한 줄만도 못합니다"

 

자야는 평생 백석을 생각하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길상사에 가면 한켠에 그녀의 이야기와 이 시가 써진 안내문이 있는데, 특히 가을에 낙엽이 흩날릴 때 이 시를 읽으면 시가 더 절절히 다가옵니다. 가난하고, 쌀쌀하기 때문에 더 애절하고 간절했던 그 시절 그들의 사랑 이야기, 영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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