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분간>,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가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 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빡 지나가버릴 生,
내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난다
1. 울음이 유난히 많았던 아이, 나희덕 시인
나희덕 시인은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울음이 많은 아이였다고 합니다. 단순히 많은 슬픔으로 인해 울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 진지한 이야기 자리 등에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그런 감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슬픔의 눈물이라기보다는, 깊은 공감능력과 애정의 눈물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녀의 시가 사람들에게 큰 공감과 위로를 주면서, 잔잔하게 우리의 눈물을 솟구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죠.
그녀의 가장 대표적인 시이자 첫 시집의 제목인 <뿌리에게>는 그녀의 등단작이기도 합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그녀는 이후에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여성시인으로서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킵니다. 그녀는 어떤 인터뷰에서 '주로 길에서 소재를 얻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녀의 시는 급변하는 80년대 후반~90년대에서 발생한 사회적 모순, 이러한 모순 속에서 생활하는 서민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어머니의 말과 같은 따뜻한 말로 우리를 위로하는 이야기 등 세상의 변화와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섬세한 관찰로 창작되었습니다.
이 시는 세 번째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에 수록된 시입니다. 이 시는 5월 8일,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편지로 올리기에도 좋은 회고적 시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나긋하면서도 강한 목소리가 투영된 이 시는 엄마로서 보내고 있는 기다림의 생에 대한 고찰을 말하고 있는 시입니다.
2. 어머니의 기다림의 삶
이 시는 '아이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소재입니다. 제목은 5분간이지만 시 전반에서 다루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일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5분은 정말 짧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잠깐 앉았다 일어나면 어느새 시간이 가 있죠. 그러나 때로는 그 5분이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언제 보통 그럴까요?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릴 때가 대표적이죠. 이 시에서는 바로 '아이를 기다리는 5분의 순간'이 그러한 순간입니다. 지나고 보면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 동안에는 1분 1초가 안 가는 듯한 긴 시간이죠. 아이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한시라도 가만히 기다리지 못하는 부모님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시인은 여기서 어머니의 삶을 '기다림의 삶'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꽃그늘 아래에서 기다리고 서성거리면서 일생이 다 지나갔을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항상 아이를 기다립니다. 그런 기다림이 반복되고 반복되면 시간은 흐를 것이고, 어느새 어머니는 흰 머리의 할머니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의 아이를 기다립니다.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침부터 집앞에 앉아 '언제 오나 언제 오나'만을 말하는 우리 시골의 할머님들의 모습, 모두 자신의 자녀들을 기다리는 모습이잖아요.
13행에서는 할머니가 된 자신의 모습과 청년이 된 아이의 모습이 서로 겹칩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조금 더 지나면 '기다려도 오지 않는 시간'이 되죠. 이는 나이가 들어 어머니 본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떨어지는 꽃잎'은 보통 '이별, 죽음' 등을 의미하니, 이 시어를 통해 '다가올 죽음에 대한 인지'를 시켜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버스가 2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지나치는 버스이며, 한 번은 다가오는 버스입니다. 어머니는 기다리는 5분간 일생의 흐름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에서야 어머니가 기다리는 구체적인 모습이 등장합니다. 아이가 타고 있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며 기다림을 완성한다는 것은, 그 버스에는 아이가 없으니 아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여 못 알아들을 말을 중얼거린다는 의미일 테지요. 그 행위 자체가 아이에 대한 기다림의 결정체이니, 기다림이 완성된다고 한 것일 겁니다.
이 시는 이렇게 '5분간의 기다림의 시간'을 소재로 하여, 일생이란 긴 것 같아도 짧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를 왜 어버이날에 읽기 좋은 시라고 할까요. 그것은 '일생이 긴 것 같아도 짧다'라는 메시지와, 시에서 늙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앞으로 정말 얼마 보지 못할 어머니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그런 어머니와 소중한 시간을 보내자'라는 시인의 말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어머니, 항상 있던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지만, 꽃잎이 떨어질 때 영영 다가갈 수 없을 수도 있게 되는 어머니. 이를 생각하면 가슴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따뜻함과 함께 잔잔한 눈물이 같이 흐르는 듯합니다.
♣ 개인적인 의견
도종환 시인은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에서 이 시를 다루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말을 곱씹으며 시를 다시 읽어 보세요.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날리는 꽃그늘 아래서 여섯 살배기 아이가 타고 올 버스를 기다리는 5분간. 아이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결국은 자식을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일생이 이렇게 지나가는 것임을. 늙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동안 아이들은 훤칠한 청년으로 자라고 그렇게 서로의 자리를 바꾸어가는 것임을. 기다림 하나로 생은 잠깐 사이에 지나가버리는 것임을. 그러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날이 오기도 하는 것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날까지 합해져서 어머니의, 부모의 기다림은 완성되어 가는 것임을.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아 저기 버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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