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닥는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ㅅ새처럼 날러 갔구나!
1. 모더니즘 시인, 정지용
정지용 시인은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우리말을 섬세하게 다루며 향토적 정서를 느끼게 해주는 시가 많습니다. 한국 시문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그이지만, 이 시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여러모로 그의 삶에도 고통이 많이 뒤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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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고향> (시 수집 35)
,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낳고 뻐꾸기 계절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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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제강점기에 유년-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일제의 착취를 눈으로 보고 빼앗긴 우리의 터전을 마주하면서 그는 진정으로 편안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시들을 더러 썼죠. 또한 광복을 맞이한 뒤에는 새로운 희망을 그렸지만 얼마 후 6.25가 터지면서 그는 납북당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죠. 죽음 이후에도 남한 문학사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작품 취급이 금지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오늘날 정지용 하면 가장 많이 떠올리는 시 중 하나이지만, 정지용 시인 본인에게는 가슴 아픈 고통으로 다가가는 시가 있습니다. 바로, 아들의 죽음을 겪고 쓴 <유리창>입니다.
2. 폐병을 앓던 아들을 잃고 쓴 시
이 시는 1930년, <조선지광> 89호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시의 특징은 연 구분이 없지만 한 문장이 1행-2행-3행-4행의 양으로 이루어져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인의 고조된 감정을 잘 드러냅니다. 또한 가장 긴 문장의 마지막 행, 즉 시의 끝에서 탄식의 어조로 마무리함으로써, 시인의 슬픈 감정이 폭발합니다. 시인이 이렇게 감정을 토해내는 이유는, 이 시가 폐병을 앓던 아들을 잃고 쓴 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뒷이야기를 듣고 시를 바라보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1행에서의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차고 슬픈 것, 그것은 죽은 아들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차가워지며, 폐병으로 젊은 자식이 죽은 것이니 슬픈 죽음이지요. 시에서의 유리창은 시인과 아들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면서도 이승과 저승이라는 공간의 단절을 의미하는 사물이기도 합니다.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유리창에 비친 아들의 모습을 보는 풍경은 더더욱 슬픈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입김을 흐리우며 아들의 형상을 남기려 하는 시인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유리창에 입김을 불었다, 지웠다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죽었기에 밤만이 밀려 나갔다가 부딪칩니다. 여기서의 밤은 '죽음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죽음 하면 어둠이 떠오르죠. 이 어둠으로 대변되는 죽음은 시인의 눈에서 눈물이 떨러지게 만듭니다. 이 눈물은 시에서 '물먹은 별'로 표현되었습니다. 보석처럼 박힌다는 것, 가슴에 슬픔이 박힌다는 거겠죠.
8행의 '외로운 활오한 심사이어니'는 아이의 죽음으로 인한 외로움과 아이의 환영을 볼 수 있다는 황홀함이 교차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역설은 환영을 보면 기쁘지만 그것은 다시 사라지고 말고, 이를 겪으면 슬픔이 더 배가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9행, 위의 황홀함과 외로움이 반복되면서 시인의 고통은 깊어져가고, 아들의 사인이 직접적으로 언급됩니다. 은유적 언어가 아닌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감정은 더더욱 고조됨을 느낍니다. 마지막 10행에서는 '시인의 슬픔'이 '날아가구나!'라는 탄식의 어조로 드러나, 아들을 잃은 슬픔이 폭발하여 분출되죠. 이렇게 시는 끝납니다.
이 시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아들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모습을 유리창을 닦는 행위로 표현하여 그린 시입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을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멍하니 있거나 아무 생각없이 반복적인 행위만을 하다가, 그리움과 슬픔은 갑자기 밀려올 것입니다. 이러한 슬픔을 담은 <유리창>, 아름다운 언어로 쓰여 더더욱 슬프게 다가오는 시입니다.
♣ 개인적인 의견
자식을 잃은 슬픔은 경험하기 싫은 슬픔입니다. 이를 겪고 그 슬픔을 시로 옮긴 정지용 시인. 시에 담긴 이런 이야기를 알면 시에 대한 분석을 하기 전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정지용 시인의 아드님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먼저 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를 쓰는 내내 정지용 시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한 자 한 자를 눈물로 썼을까요. 시에 자신의 감정을 담으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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