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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모아 시

김종길, <성탄제> (시 수집 68)

by 알쓸수집가 202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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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1. 영문학을 전공하고 고전적인 미가 깃든 시를 쓴 김종길 시인

김종길 시인은 192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고려대 영문과와 대학원을 전공하고, 영국 셰필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이러한 영문학 전공은 그의 시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시는 서구적인 감성과 우리 전통의 고전적인 미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첫 시집 <<성탄제>>에서부터가 이러한 미를 잘 가지고 있죠.

 

성탄제서양의 기념일입니다. 지금은 우리에게도 소중한 기념일이지만 당시에는 다소 생소한, 서양의 기념일이었죠. 하지만 <<성탄제>>에 수록된 시들을 보면 하나하나가 우리 전통의 고전적인 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알아볼 김종길 시인의 가장 대표적인 시 <성탄제>가 그러합니다.

 

 

 

 

 

2. 서구적 감수성이 묻어나는 성탄제에 느낀 전통적인 부성애

<성탄제>는 1955년 4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시입니다. 이후 <<성탄제>>에 수록된 시인의 대표적인 시죠. 총 10연 22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일단 제목인 '성탄제'입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도 아닌 '성탄제'라는 말은 서구적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전적이며 다소 묵직한 느낌을 주는 이름입니다. '성탄제'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시에서 나타나는 아버지의 사랑과 연결되면서 '숭고한 분위기'를 더더욱 강조합니다.

 

시는 화자의 과거 회상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 장면은 어두운 방, 숯불이 피어나는 작은 집 안입니다. 숯불을 핀다는 배경이 향토적이고 우리만의 고전적인 분위기를 띱니다. 화자는 병에 걸려 앓고 있었고, 이를 할머니는 애처로이 바라봅니다.

 

뒤이어 곧 눈 속을 헤치고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새하얀 눈에서 붉은 산수유 열매를 품에 안고 온 아버지를 보고, 화자는 열로 상기한 볼을 부빕니다. 이것이 1~4연의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아픈 자식이라는 병약한 이미지와, 이를 돌보는 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에 대한 과정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흰 눈'과 '붉은 산수유 열매'와 같은 색채 대비입니다. 이러한 색채 대비를 통해서 붉은 산수유 열매의 강렬한 이미지를 그립니다. 이 붉은 산수유 열매는 확장하여 생각하면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달아오른 마음일수도, 아픈 자식 때문에 눈물이 맺혀 충혈된 아버지의 눈일 수도 있습니다.

 

 

3.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의 사랑과 같다

5연에서는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느낀 밤을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성탄제는 인간을 위해 희생한 예수와 관련된 기념일이죠. 성탄제라는 시간적 배경을 설정하여, 아버지의 사랑은 신의 사랑과 같은 숭고함을 띱니다. 신 대신 내려주셨다는 아버지와 어머니, 시인은 이러한 말을 '성탄제'라는 단어를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4. 이제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6연부터는 현재의 화자로 이동합니다. 현재의 화자는 이전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이제 사회는 변하여 빠알간 숯불을 집 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도시들만이 줄비합니다. 이런 곳에서 화자는 과거의 추억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나 봅니다. 그 옛날의 것, 즉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반갑다고 하니 말이죠. 여기서의 '그 옛날의 것(눈)'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입니다.

 

눈을 보며 떠올린 아버지, 화자가 아버지만큼 나이가 들어도 아버지 앞에서 화자는 영원한 어린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와 그때의 기억을 생각하며 왜인지 모를 서러움이 몰려들고,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이 느껴집니다. 기댈 곳 없는 현실에서 화자가 기대고 싶은 곳, 바로 아버지의 옷자락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과 덕분에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산수유 붉은 알알이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른다는 표현으로 말이죠.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산수유 열매는 내 혈액 속에서 영원히 흐르면서,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지금까지 세상을 살고 있다는 메세지를 전달합니다.

 

이렇게 이 시는 '성탄제'라는 서구적 이미지와 '어릴 적 아버지의 순수한 사랑'이라는 고전적이고 한국적인 이미지가 결합하였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산수유 열매처럼 붉고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자식이기 때문이죠.

 

 

♣ 개인적인 의견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시들이 많지만,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 역시 우리를 지금까지 있게 해준 원동력이죠.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는 <성탄제>를 읽으며, 내 안에 깃든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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