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한 바람.
앞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낱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1 . 비 오는 날, 조용히 시를 읽다
정지용 시인의 시에는 우리 민족, 우리 강산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특유의 정서를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향토적 정서'로 가득한 시를 썼던 정지용 시인은 <향수>, <유리창>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죠.
*정지용 시인이 더 궁금하다면?
https://c-knowledge.tistory.com/69
정지용, <고향> (시 수집 35)
,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낳고 뻐꾸기 계절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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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중 하나, 비 오는 날에 읽기 좋은 시를 가져왔습니다. 비 오기 전과 오는 직후의 풍경을 시각적으로 묘사하였으며, 서정적인 어조로 마음도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시, <비>입니다.
2. 1941년 1월 발표된 시
이 시는 1941년 1월 <<문장>> 22호에 발표된 시입니다. 비가 내리기 전과 후의 풍경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시입니다. 비 내리기 전의 모습은 평화로우면서도 무엇인가 일이 일어날 듯한 미묘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가 내린 후에는 하늘이 점차 맑아지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하고 평화로운 날이 다시 찾아오죠. 이러한 시간적 흐름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서정적이고 절제된 어조로 그려낸 시가 이 <비>입니다.
시는 비 오기 전과 비 오는 때를 '감각적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기 직전의 가장 큰 변화는 시각적인 변화죠. 비구름이 몰려오면서 날이 흐려지고, 주위는 어두컴컴해집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비만 보이고 앞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 도래합니다. 물길은 비로 인하여 거세지고, 계곡은 범람합니다. 이러한 시각적 변화 외에 청각적/촉각적 감각을 시에 녹여 냈습니다.
3. 1~6연, 비가 오기 전~비 오기 시작하는 풍경
1~2연은 비가 오기 전의 상황입니다. 그늘이 찬다는 시각적 감각과 소소리 바람이 분다는 촉각적 감각을 사용하여, 평화로운 날, 비가 오기 전의 미묘한 긴장감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소리 바람은 이른 봄에 부는 매서운 바람입니다. 비가 오기 전, 날씨가 급변하는 모습을 잘 드러내는 자연물이죠.
이후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시인은 비가 내리는 모습을 마치 새에 비유했습니다. 3연의 '앞 섰거니 하야 /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라는 표현은 앞다퉈 쏟아지는 비를 새에 비유한 것입니다. 꼬리를 치날리는 것은 비가 지면에 부딪혀 다시 튀어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하죠. 4연 역시 빗방울이 점점 세게 떨어지는 모습을 '산새 걸음걸이' 같다고 하였습니다.
비가 내리면 계곡이 불어납니다. 계곡이 불어나면 잔잔한 물결은 파도처럼 거칠어지고, 흰 거품이 일어납니다. 이를 5연에서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5연의 손가락을 편다는 것은 계곡물이 불어서 여러 갈래로 물길이 난다는 의미입니다. 앞서서 빗방울을 새에 비유했다면, 여기서는 계곡의 여러 갈래를 손가락에 비유했습니다.
4. 멎었다가 다시 내리는 비로 마무리
뒤이어 비는 잠시 멎은 듯합니다. 그러나 새삼 다시 돋아납니다. 비가 내렸다 잠깐 그친 짤막한 순간을 시인은 포착하여 시에 담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풍경 하나로 끝나지 않고, 잠시 그치기도 하는 장면의 전환을 가지게 됩니다. 이 덕분에 더욱더 다채로운 장면이 그려지죠. 그리고 마지막은 붉은 잎사귀를 비가 밟고 가듯이 떨어진다는 감각적인 묘사로 끝내고 있습니다.
이 시는 이렇게 통일된 운율감과 전체적으로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우리 자연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려진 비 내리는 이미지는 선명하게 우리에게 각인됩니다. 정지용 시인의 서정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정지용 시인의 시가 더 궁금하다면?
https://c-knowledge.tistory.com/73
정지용, <유리창> (시 수집 39)
,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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