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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모아 시

심보선, <아버지, 옛집을 생각하며> (시 수집 86)

by 알쓸수집가 2023.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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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옛집을 생각하며>, 심보선

 

이 방의 천장은 낮다, 점프

하지 않아도 천장에 닿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속

되냐

섀시 창문 밖으로 천장의 유혹을 간직하고

구름은 지나간다

 

아버지는 퇴근하면 가방을 열어

가방 모양의 공기를 마루 위에 쏟아내곤 했다

이야, 놀라워라 어린 자식들의 조건 없는 탄성이여

가끔씩 옛집을 생각하면

피융, 하고 양쪽 뺨을 스치며 앞뒤로 지나가는

기억과 망각의 총탄이여

 

이 집 안방에는 그러고 보니 깊은 절벽이 숨어 있다.

저 밑에는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바닥

돌아보면 누이는 저만치 뒤에 있고 어머니는 더 뒤에 있고

더더더 뒤에는 그냥 장롱벽

거기 기대어 아버지

좌탈입망, 돌아가셨다

아버지 왼손에 쥐어진

위성TV 리모컨

 

감자조림 미끼로 낚시질 가시던

빈 링거병 꽂고 누워 계시던

소싯적에 거 참 잘생기셨던

아버지, 망부 청송심씨후인

위패를 쓰다 난 으이씨, 하고 울었다

아버지, 어찌

죽음 갖고 아트를 하십니까

 

내가 좋아하는 곳은 옛집의 지하실

도망갈 수 없는 곳, 다시는 돌아가려 하지 않아도

이미 돌아와 있는 곳

평화가 린나이 보일러처럼 자알 작동하는 곳

 

나는 낮은 천장 아래 홀로

소파 뒤에 바짝 등 붙이고

낮은 포복으로 몰려오는 미래를 빠끔히 내다보고

있다

 

가족들은 이 집 어딘가에서 소식도 없이

각자 잘 살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1. 심보선 시인의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시인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994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경>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그만의 언어로 개성있는 시를 써왔죠.

 

그의 시를 읽으면 비극적인 분위기와 풍자 혹은 해학의 분위기가 섞여 있는 듯함을 느낍니다. 마치 쓴웃음을 짓고 있는 듯한 화자의 얼굴이 그려지는데, 이는 심보선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독특한 면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시에서 다루고 있는 슬픔, 비극 등을 더 부각시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잘 풍기는 시가 바로 <아버지, 옛집을 생각하며>입니다. 이 시는 심보선 시인의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 실린 시입니다. 

 

 

2. 아들의 어리광과 같은 슬픔, 아버지와 옛집

이 시의 화자는 옛집과 그곳에서의 가족의 삶, 그리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회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쓴웃음을 짓게 하는 포인트는 중간의 '위패를 쓰다 난 으이씨, 하고 울었다'입니다. 으이씨라는 표현, 다 큰 어른이 하기에는 철없어 보이는, 오히려 애들한테 어울리는 표현이죠. 이 말은 화자의 상황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화자는 아버지의 위패를 쓰다가 으이씨라는 외마디를 질렀기 때문이죠. 

 

으이씨라는 표현을 통하여 시는 비극과 동시에 해학, 풍자적인 면을 가지게 됩니다. 으이씨 외에 이러한 표현들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첫 행의 '점프'(의도적 행갈이), 으이씨 아래의 '죽음 갖고 아트를 하십니까' 등이 대표적이죠. 이러한 언어가 심보선 시인만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그다지 높지 않은 천장을 보유한 옛집의 기억은 멀어지다

화자는 옛집을 회상하며 그 당시의 삶을 떠올립니다. 옛집은 천장이 낮아 점프하지 않아도 머리가 닿을 정도의 집이죠. 그런 집에서 지낸 화자의 가족들. 아버지는 공기를 마루 위에 쏟고 이를 자식들은 순수한 탄성으로 호응합니다. 당시의 가난했지만 나름대로 순수하고 즐거움이 있던 삶. 하지만 그런 과거의 기억은 점점 잊힙니다.

 

3연에서는 이 집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 집에는 '깊은 절벽'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가난의 굴레를 의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난했기에 집은 천장도 낮고, 아버지와 화자는 겨우 공기를 가지고 놀기만 합니다. 그 가난이라는 구덩이에서 올라올 수는 없었습니다. 이를 숨어 있는 깊은 절벽이라고 표현하여, 당시 가족이 겪어야 했던 시련을 말하고 있죠.

 

이러한 시련 속에서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십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어머니는 망부가 되었죠. 화자는 으이씨라는 아이의 표현을 통하여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슬픔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3. 그럼에도 나는 그 옛집을 좋아한다

이렇게 슬픔과 비극이 한 구석을 차지했던 옛집. 하지만 화자의 기억 속에서 그 옛집은 어린 시절, 자신과 가족을 품었던 소중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돌아가려 하지 않아도 돌아와 있는 곳이라는 말은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연을 통하여 화자는 이 옛집에서 가족들이 각자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옛집에 사는 가족들은 소식은 없죠. 희미해져 가는 옛집의 기억 속에서, 어린 시절 가족들의 모습 역시도 같이 희미해지고, 이를 화자는 '소식도 없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버지가 떠난 그 옛집, 이제는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의 그 옛집에서 화자는 가족들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지만 기억 속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집니다. 

 

 

♣ 개인적인 감상

이 시를 통해 심보선 시인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시를 읽으면 슬픔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쓴웃음을 짓고,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는 화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는 옛집의 풍경과 그 당시의 고달픔, 그곳에서 생을 마친 아버지에 대한 슬픔 등 복합적인 배경과 어우러져 시가 풍기는 분위기를 다양하게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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