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꽃들이 되어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1. 소외된 존재에 대한 따스한 사랑, 정호승 시인의 시
정호승 시인의 시는 소외된 이들을 어루만지는 따스함과 애정이 가득한 시입니다. 소외된 존재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관심도 잘 받지 못한 채 힘든 삶을 살아오고 있는 저소득층과 같은 계층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디에나 있는 작고 보잘것없는 물건이기도 하고 때로는 모두를 아우른, 모진 세상과 그 안에서 더 모진 기득권에 억눌려서 살아가는 우리 전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존재들에게 정호승 시인은 따스한 손을 건넵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위로와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 앞장서서 시로 이야기를 하죠. 가을이 찾아오는 9월, 날은 점점 쓸쓸해지고 기분은 울적해지는 요즘, 정호승 시인의 손이 그리울 때 이 시를 읽어 보는 건 어떨까요?
2. 비바람을 맞으며 안간힘을 쓰는 들국화 한 송이
가을비는 여름비와 다르게 내릴수록 기온이 내려갑니다. 비가 내린 뒤에는 스산함이 가득하죠. 그런 가을비 내리는 어느날, 들국화 한 송이가 구석에서 힘겹게 꽃을 피웠습니다. 시인은 이 구석의 들국화 한 송이를 보고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나 봅니다.
"이 들국화는 세상의 풍파를 견디고 꽃을 피워낸, 소중한 생명이다. 이 작지만 고귀한 생명을 내가 지키고 싶다"
이처럼 이 시는 '들국화'로 대변되는 '소외된 존재'에 대한 관심과 따뜻함, 위로를 건네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 존재가 비를 맞을 때, 우산이 되어주고 싶다고 합니다. 비를 피할 수 있게 자신이 기꺼이 비를 맞겠다 하며 꽃을 무사히 피울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소망을 1연에서 드러냅니다.
3. 들국화는 시련 속에서 지내왔다
2연에서는 이 소외된 존재의 현실이 그려집니다. 살기 위해서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지고, 차갑디 차가운 담벼락에라도 기대어 짧은 휴식을 취하는 존재. 하지만 작고 연약한 들국화에게 이러한 삶은 큰 좌절이기도 하겠죠. 이를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3연 역시 들국화와 같이 소외된 존재의 상황이 나타납니다. 소외된 이들의 삶은 사막과 같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오아시스는 보이지 않죠. '너는 지금 어느 곳 /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는 이러한 상황 한가운데에 있는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걱정을 환기시킵니다.
시인은 이러한 존재들을 무심코 지나지 않습니다. 사막의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안식의 공간이 되고 싶고, 황폐한 사막에서 꽃과 같은 존재가 되어 희망을 주고 싶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인의 의지가 4연에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2연과 3연에서는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상황을 말하고 1연과 4연에서는 '우산, 들국화, 지평선, 천국'이라는 희망과 위로의 단어를 사용하여 소오된 존재들을 어루만지고자 하는 의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감상
정호승 시인의 시는 사막 한가운데에 자라난 꽃 같습니다. 꽃 한 송이. 사실 크게 의미가 있는, 그런 대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꽃을 사막 한가운데에서 본다면 그 의미는 남다를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사막 한가운데의 꽃처럼, 우리가 절망 한가운데에 빠져 있을 때 작지만 무엇보다 환한 빛과 향기를 가지고 우리를 맞이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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