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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모아 시

황동규, <즐거운 편지> (시 수집 20)

by 알쓸수집가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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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1. 황순원의 아들, 문학을 이어받다

황동규 시인은 소설가 황순원의 아들입니다. 1938년 평안남도 숙천이라는 곳에서 출생한 황동규 시인은 1946년에 월남에 서울에서 성장했습니다. 6.25를 겪은 뒤, 그는 영문과에 진학합니다. 당시 황동규 시인의 부모님은 의과나 법과대학을 가기를 희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동규 시인은 문학을 하지 않는 삶은 매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영문과에 진학하죠. 황순원 소설가는 아들의 결정을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후회하지 않을 일은 뭐든 해도 좋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를 보면, 아들의 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아버지입니다. 

 

그는 1958년, 서정주에 의해서 시 <시월>, <동백나무>, <즐거운 편지>가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했습니다. 황동규 시인의 시는 시기에 따라서 굉장히 다채롭습니다. 초기에는 <즐거운 편지> ,<엽서>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과 관련된 서정시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 사랑은 황동규 시인 특유의 언어로 독특하게 그려집니다. <즐거운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시는 어떠한 소설 하나를 읽는 것처럼 꾸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 이전의 사랑시가 어떤 전통적인 지조, 수동적인 자세를 다룬 고전적 미학의 시였기에, 그의 사랑시는 정말 젊은 이가 내뿜는 신선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는 시 세계가 좀 더 성숙해졌습니다. 시대적 상황의 모순을 직접 경험하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는 시대 상황에 대한 어떠한 메시지를 시에 담았습니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가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독재 정권이 이어지면서 더욱 심화됩니다. 

 

황동규 시인의 시는 공통적으로 서정시의 면을 띄고 있습니다. 또한 연작시도 대표적인 특징이죠. 오늘은 그의 가장 대표적인 시면서 풋풋한 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애정시, <즐거운 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2. 풋풋한 사랑, 즐거운 편지

이 시는 황동규 시인이 18살일 때, 연상 여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담은 사랑시입니다. 1961년의 첫 시집에 수록되었으니 거의 60년이 넘게 흘렀지만, 지금도 연애 편지를 이렇게 아름답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아름다운 시입니다. 이 시가 사랑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심어준 시 중 하나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반적인 전통적 정서를 뛰어넘어, 적극적인 자세로 기다림을 노래함

2. 서구적 인식의 로맨티시즘에 바탕을 두고 순수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음

3. 소설처럼 어떠한 이야기 흐름이 있음

 

특히 3은 아버지 황순원 소설가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2연을 보면, 화자의 사랑에 시련을 주는 '눈이 내리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이러한 서사적인 전개는 시련이자 사랑이 더욱 다져지는 장치로 활용됩니다. 시 안에서의 긴장감을 높이는 장치로, 마치 소설에서의 '위기' 장면을 읽는 듯합니다. 시인은 이러한 문장을 활용하여 시 안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어떠한 상황이 다가와도 나의 의지를 유지할 것이라는 다짐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아름다운 표현들로 꾸민 '사랑'

시는 크게 2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연에서는 반어적 표현법을 통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사소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사랑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 행들에서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겠다는 의지를 표망하고 있습니다. 이 사소한 감정은 한낱 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화자가 유지하고 있는 감정입니다. 사랑을 사소하다고 표현하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감정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며 어딜가도 존재하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사소한 것이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딜 가도 있어서 사소한 물건처럼 사랑이 시인의 곁에 계속 머무르고 있음을 의미하나 봅니다.

 

2연에서는 '눈'이라는 상황을 통해서 이 사랑이 언젠가 그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자는 이를 체념하거나 절망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입니다. 이를 인정한 다음, 기다림이라는 변함없는 자세를 바탕으로 그대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언젠가 녹을 사랑의 속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이라는 자세로 사랑하는 당신을 그리워하겠다는 의지' 두 가지를 동시에 노래하고 있죠. 시인은 이 의지를 아주 섬세한 언어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시는 황동규 시인이 아주 풋풋한 나이인 18살에 쓴 시입니다. 그만큼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찼을 테지만, 이에 무조건적으로 좌절하거나 애써 잊는 자세를 취하지는 않을 거라는 의지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이 아름다운 노래로 승화된 이 시를 읽으면, '사랑은 한 번 가지면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지만 그럼에도 계속 가지고 싶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감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개인적인 감상

이 시는 많은 영화 감독들을 사로잡은 시입니다. 왜냐하면 영화 '편지'와 '8월의 크리스마스'가 이 시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편지'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시를 읽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많은 관객들의 눈물을 흘린 장면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지나도 '사랑하는 감정'은 변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이 시처럼, 세월이 지나도 '사랑을 이렇게 아름답게 편지로 적을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은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황동규 시인은 시기에 따라 다양한 시도를 하며 시를 창작했습니다. 이렇게 풋풋한 사랑을 노래처럼 표현하다가도, 독재 정권하에서의 저항의식을 담은 시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연작시를 포함하여 실험적인 시를 창작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황순원 소설가의 아들이면서도 아버지와는 구별되는 그만의 길을 닦아 왔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길을 걸어왔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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