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포>, 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을.
나의 자랑은 자멸이다.
무수한 복안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이형기 시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는 <낙화>입니다. 한울한울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지은 이 시는 이형기 시인을 대표하는 시죠. <낙화>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의 핵심 상태는 '떨어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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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낙화> (시 수집 2)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보에 싸여 지금은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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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시인의 시 중에는 '떨어지는 존재'를 대상으로 한, 또 하나의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바로 <폭포>라는 시입니다.
1. 강렬한 폭포의 물줄기처럼, 강렬한 시어를 사용한 시
이 시는 총 5연으로 이루어진 서정시입니다. 관념적인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 관념시이기도 하죠. 이 시의 소재 '폭포'는 낙화처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조용하게 떨어지는 낙화와 다르게, 폭포의 떨어짐은 강렬하고 그 모습에 압도되죠. 시인은 이 <폭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2. 섬뜩한 이미지, 그것이 폭포로 표현된 시인의 의지를 더 강렬히 드러내다
시에서 폭포는 다양한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1연의 '시퍼런 칼자욱', 2연의 '벼랑의 직립', 3연의 '석탄기의 종말'과 '장수잠자리의 추락', 4연의 '자멸'과 '맹목의 물보라', 5연의 '2억 년 묵은 칼자욱' 등이 대표적입니다. 시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칼자욱은 시를 읽는 내내 이 시의 분위기가 결코 가볍지 않고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1연에서는 물을 거침없이 지상으로 내리꽂는 폭포의 모습이 마치 칼자욱 같다고 했습니다. 그냥 칼자욱도 아니고 '시퍼런 칼자욱'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폭포의 강렬한 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인은 1연부터 폭포를 자연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어떠한 관념적인 존재로 바라봅니다. 물론 폭포는 단순히 시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에서의 폭포는 '고통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인의 강인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단순한 자연물 그 이상의 복합적인 존재이기에 폭포는 무엇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습니다. 시인은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각 연에서 강렬하면서도 관념적인 이미지를 폭포에 심어줍니다.
3. 연마다 진해지는 폭포의 강렬한 이미지
2연에서는 떨어지는 폭포와 대조적인 이미지인 우뚝 직립해 있는 절벽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 대조는 한편으로는 절벽에서 폭포가 시작되기에 떨어지기 직전 극한의 상황에 몰린 이미지를 그려냅니다. 벼랑의 끝은 폭포의 시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벼랑의 직립 역시, 폭포와 연결된 이미지로 그려집니다. 2연을 읽으면 마치 폭포에 떨어지기 전, 벼랑 위에 서 있는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가슴은 콱 막혀오고 식은 땀이 나는 극한의 상황입니다.
3연에서는 폭포의 이미지를 석탄기에 추락사한 장수잠자리로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추락'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드러냄으로서 폭포의 하강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 장수잠자리의 추락은 단순히 폭포의 이미지와 연결됨을 넘어서서, 한 생명의 끝이라는 결말을 통해, 어떠한 좌절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3연에서는 상승-하강의 이미지가 동시에 그려지면서, 거대한 비극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작은 존재의 숙명이 나타납니다.
4연에서는 '자랑은 자멸'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나옵니다. 3연의 잠자리가 떨어진 이후, 생명의 죽음을 수정체가 박살나는 상황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의 '맹목의 물보라'에서 '맹목'은 무엇에 대한 맹목을 의미할까요? 아마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 자리에 정체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물의 속성을 '맹목'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5연은 다시 나의 등판에 떨어지는 시퍼런 칼자욱을 2억 년이나 묵었다고 표현하여, 이 고통의 무게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치 수도승이 폭포수에서 칼날 같이 서글픈 폭포를 맞으면서, 고행을 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시에서 폭포는 하강의 존재, 인간 좌절의 존재, 고통을 주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흘러가는 주체적인 존재, 다시 절벽으로 올라가는 상승의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고통을 통해서 의지와 깨달음을 얻는 고행자의 정신이 이 시에는 깃들어져 있습니다.
시인은 폭포를 통해서 수많은 고통이 짊어져도 다시 나는 나의 길을 자유롭게 나아갈 것임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한 이미지를 위해서 비극적이고 섬뜩한 이미지를 폭포에 심었고, 이는 폭포가 자연이 아닌 어떠한 관념적 대상으로 변모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제 : 나라는 존재에 대한 비극적인 상황, 그럼에도 부정적 현실과 맞서서 순수한 정신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의지
소재 : 폭포
특징 :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와 역설 등의 표현으로 비극과 의지를 동시에 강조
♠ 개인적인 감상
<낙화>를 읽고 <폭포>를 읽으면, 이형기 시인은 자연물에 대해 어떠한 관념적인 이미지를 씌우는 것을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폭포에 씌워진 여러 이미지를 상상하다 보면 폭포라는 존재가 한없이 무서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인정하면서도 시인은 그 폭포를 피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몸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2억 년 동안이나 폭포를 맞으며, 폭포의 끊임없이 흐르는 이미지를 지향하겠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김수영 시인의 <폭포>와 함께 읽어도 좋은 시입니다. <폭포>를 소재로 한 두 명시를 읽으며, 폭포의 웅장한 소리에 나의 잠자던 의식을 깨우치고, 폭포의 강렬한 물결을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나의 에너지로 삼으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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