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모아모아 시

신경림, <농무> (시 수집 49)

by 알쓸수집가 2023. 5. 23.
728x90
반응형

<농무>,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둘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1. 농민시인 신경림을 세상에 알리다

신경림 시인은 '농민시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인입니다. 그는 농민의 삶과 고달픔을 투박한 광경과 서정적인 어조로 표현한 시들을 많이 다루었습니다. 신경림 시인이 시 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시기는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던 시기입니다.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농촌은 소외받기만 했죠. 이 땅을 일구는 데 큰 역할을 한 농사가 외면받고, 흥얼거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를 연 농촌은 급속도로 삭막해집니다.

아마 신경림 시인은 시를 통해서 이러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나아가 농촌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애달픈 삶을 대변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의 시가 민중시의 성향을 띠는 것은, 단순한 농촌의 문제만을 다루기보다는 농민의 고달픈 삶과 이에 대한 비판의식을 시에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https://c-knowledge.tistory.com/76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시 수집 42)

,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c-knowledge.tistory.com

 

이렇게 신경림 하면 '농민시인'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만든 시집은 그의 첫 시집 <<농무>>입니다. 이 시집은 1973년에 간행된 시집으로, 농촌에서 볼 수 있는 농악(농무)을 소재로 하여 소란스러운 농촌 속에서 쓸쓸하고 적막함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이 시집의 표제시이자 신경림 하면 떠오르는 시, <농무>를 감상해 보죠.

 

 

2. 농무란?

농무는 농악무로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무용 중 하나이죠. 농무는 우리 전통악기의 소리에 맞춰 춤을 추거나 상모놀이를 하는 등의 무용인데, 이 기원은 상당히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대부터 농경이 중요했기에 고대 국가들에서는 국가적으로도 풍년을 기원하는 다양한 의식을 치러왔죠. 이 농무는 농민들 각각이 풍년을 빌고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해 쳐오던 무용이 여러 변형된 형태를 거쳐서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농무는 굉장히 쾌할하고 활기찬 율동, 흥겨운 가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는 이들도 덩실덩실 움직이게 하는 춤이죠. 이 시 <농무>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 춤은 흥겹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소리로 가득하지만 그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웃는 사람들은 몇 없어 썰렁함 속에 소리만 가득한 듯한 느낌을 주죠.

 

 

3. 막이 내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시의 분위기

1행부터 시는 '막이 내렸다'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제목 <농무>대로라면 들어가자마자 흥얼거려야 하는데 막이 내렸다는 말로 시작하죠. 이러한 하강, 종료의 이미지는 시의 분위기를 어둡게 잡습니다. 뒤이어서 농무가 끝난 뒤의 휑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운동장은 텅 비어 있고, 농무를 춘 사람들은 분조차 지우지 못한 채로 소줏집에 몰려서 술을 마십니다. 정상적이라면 즐겁게 술을 마시며 오늘 하루의 즐거움을 절정으로 끌어올려야 하지만, 6행에서 소줏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원통한 심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아마 농민들은 적막하고 사람 없는 농촌에서 힘겹게 농사를 지으며 삶을 이어나가려고, 그 일환으로 농무를 췄지만 그럴수록 답답함과 애달픔은 커졌을 겁니다. 4행의 '분이 진 얼굴'이 마치 '울분이 진 얼굴'로 읽히기도 합니다.

 

 

4. 옛날과 다른 농촌의 분위기

예부터 농사 관련 행사는 마을의 잔치와 같았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나와서 행사를 즐기며 놀았죠. 하지만 이 당시의 농촌은 그렇지 않았나봅니다. 꽹과리를 앞세워 나가도 8행에서 따라붙는 것들은 쪼무래기뿐이라고 하고, 9행에서 처녀 애들은 그런 농민들의 모습을 비웃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젊은 사람들의 농촌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그 속에서 소외받는 농민들을 대변하죠. 젊은 세대인 처녀 애들은 농민들의 그런 모습을 우스꽝스러워하기만 하고, 청년들은 진작 도시로 떠난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을 울부짖게 만듭니다. 12행에서 울부짖는 꺽정이가 등장하는데 여기서의 꺽정이는 임꺽정입니다. 임꺽정은 잘못된 현실에 맞서 싸우는 민중의 영웅입니다. 임꺽정처럼 울부짖는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농민들의 삶이 고달프고 어렵다는 의미죠. 그다음 행에서 해해대는 서림이가 나옴으로써, 이 두 행은 대비의 효과를 가집니다. 울부짖는 꺽정이도, 해해대는 서림이도 대비되는 존재이지만 농촌 소외 현상이 만든 부정적인 장면들입니다.

 

이어서는 농민들의 심정이 단적으로 묘사됩니다. 산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 비료값도 안 나온다는 것, 이런 농사들은 아내한테나 맡겨둔다는 것 모두 직설적이고 투박하여 더더욱 그들의 감정이 강하게 표출되죠. 산업화로 소외된 농촌과 농민들의 울붐은 이 부분을 통해 폭발합니다.

 

 

5. 농무를 추고 신명 나게 울부짖다

폭발한 농민들은 쇠전을 거쳐 도수장, 즉 도살장 앞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도살장 앞에 와서야 신명이 난다고 합니다. 이는 반어와 역설이 동시에 사용되었죠. 도살장에 와서야 신명이 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농민들의 좌절감이 죽음 앞의 순간과 다름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죽어야 차라리 신명이 날 것 같다는 자괴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 자체를 신명 난다고 한 것도 그들의 절망을 더더욱 강조하죠.

 

그리고 마지막은 농무의 한 동작,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어깨를 흔드는 등의 동작으로 마무리됩니다. 농무 동작으로 마무리함으로써, 농민들의 절망과 저항의식, 울분이 한꺼번에 표출됩니다. 결국 이 시에서 농무는 흥겨운 춤이 아니라, 울분을 발산하는 농민들의 저항 수단인 셈이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