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착어 :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두부 장수의 핑경 소리가 요즘은 없어졌다. 타이탄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온 사람이 핸드 마이크로 아침부터 떠들어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어디선가 병원에서 또 아이가 하나 태어난 모양이다. 젖소가 제 젖꼭지로 그 아이를 키우리라.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1. 황지우 시인이 기다리는 너
황지우 시인은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을 담은 시들을 써 옴과 동시에, 시적으로는 '형식을 파괴하고 다양한 시도'를 해 왔습니다. 그의 대표작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게로> 등을 포함한 많은 시들이 이러한 그의 시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황지우 시인이 더 궁금하다면?
https://c-knowledge.tistory.com/46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시 수집 15)
, 황지우 영화(映畫)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 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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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knowledge.tistory.com/64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게로> (시 수집 30)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십삼 도 영하 이십 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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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들과 함께 황지우 시인 하면 떠오르는 시 중 하나, 1991년 발행된 시집 <<게 눈 속의 연꽃>>에 수록된 <너를 기다리는 동안>입니다. 이 시 역시 형식적으로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시 아래의 '착어'입니다. 착어란, 원래 석가모니의 말과 행동에 대해 붙이는 평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시에 대한 평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착어를 통해서 시인이 기다리는 너는 어떤 것인지를 확대하여 알아볼 수 있죠.
그럼 시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2. 너를 기다린다
화자는 '너'를 기다립니다. 여기서의 너는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목표, 희망과 같은 바람이나 이념일 수도 있습니다. 네가 오기로 한 자리에서 화자는 너를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 우리는 어떤 감정이 드나요? 설레고, 저기서 오는 사람이 상대방인가 싶어 괜히 주위를 살펴보곤 합니다. 화자 역시 3~5행에서 알 수 있듯, 너를 초조함과 설렘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7행의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설의적 표현을 통해서 기다림의 시간에 대한 초조함을 드러내는군요. 그렇죠. 애인을 기다릴 때면 괜히 긴장되고, 얼굴과 옷맵시를 한 번 더 확인하고 그러지 않나요. 이처럼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설렘과 초조함으로 둘러쌓인 어찌 보면 가슴 애리는 일이죠.
3. 너가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화자 앞에 너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습니다. 화자는 계속 그 자리에서 기다리지만, 너는 오지 않습니다.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는 표현이 과거에서 미래 표현으로 바뀌면서, 화자의 기대가 점차 불안으로 바뀌고 너가 올 것이라는 확신에서 점차 추상적인 상상으로 바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결국 문은 닫힙니다. 너가 문을 열고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4. 너를 향해 내가 가겠다
그리고 15행에서는 결국 화자의 마음가짐이 바뀝니다. 너를 향한 마음은 같지만 이전에는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면 이제 더 적극적으로 변해 너를 향해 가는 것이죠. 이 소극적에서 적극적인 자세의 변환을 통해서 시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중간의 불안과 초조함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려도 너는 오고 있다'라는 확신으로 바뀌고, 천천히 기다리는 수동적 자세에서 '너를 기다리는 동안 가고 있는' 능동적 자세로 변하면서 의지는 더욱 강해집니다.
이 시에서의 마지막행은 20행과 거의 같은 반복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화자의 너를 만나겠다는 의지는 더더욱 강조되고 시는 기대 → 실망 → 전환 → 의지라는 복합적인 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5. 착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점, 너의 의미
착어에서는 기다림이 없는 사랑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사랑, 희망, 민주, 자유, 평화 등은 모두 기다림을 필요로 하며, 기다릴수록 더더욱 만나고 싶은 의지가 커지는 것들입니다. 이 부분이 주목할 점입니다. 황지우 시인이 이전부터 독재에 대한 저항시, 민중의 계몽을 일깨우는 시를 썼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쩌면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시대적 계몽, 민주주의'와 같은 것들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 기다리는 대상은 시의 중간에서 말한 것처럼 쉽사리 오지 않지만, 그렇기에 그 대상을 더 바라볼 수 있고, 더 의지를 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착어의 마지막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라는 말을 통해서 간절한 기다림과 이로 인해 다질 수 있게 되는 희망과 의지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감상
기다림이 아주 사소한 무엇이든, 국가적 세계적인 가치나 이념이든지 간에 그것에 대한 애뜻한 마음은 다 비등할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기에, 희망도 있고, 의지도 있고,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기에 추운 겨울, 한밤중에 바깥에서 사랑하는 상대방을 더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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