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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모아 시

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시 수집 94)

by 알쓸수집가 2023.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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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유혹>, 김광규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 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1. 김광규 시인의 약력

김광규 시인은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어독문학과를 전공한 그는 독일문학을 번역하며 독일과 한국의 문학 교류에도 많은 힘을 쓴 시인입니다. 그의 시는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여 쓴 '일상시'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시입니다. 

 

그는 1975년, <<문학과지성>>에 시 <유무>, <영산>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습니다. 1979년에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을 발간한 이후, <<반달곰에게>>(1981), <<아니다 그렇지 않다>>(1983), <<크낙산의 마음>>(1986) 등에서 일상적인 현실과 이에 대한 감정을 시에 담아왔죠. 일상은 때로는 아름답기도, 때로는 쓸쓸하고 고독하기도 하죠. 당시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는 이러한 이중성은 더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오늘의 시 <대장간의 유혹>은 획일화되고 기계화된 우리의 일상에 대한 쓸쓸함이 담겨 있는, 그러한 시입니다.

 

 

2. 대장간이 없어진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

이 시는 총 20행으로 이루어진 시입니다. <<좀팽이처럼>>(1988)에 수록된 시죠. 시에서는 두 가지 문명이 충돌합니다. 아파트, 플라스틱 물건의 현대 문명대장간, 낫과 호미 등의 과거 문명이죠. 

 

우리는 플라스틱, 아파트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명들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 주죠. 아파트 덕분에 주거의 질이 높아졌고, 플라스틱 덕분에 많은 편리한 일회용품이 만들어졌으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현대 문명으로 인해 우리는 획일화되고, 기계부품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시가 쓰인 당시 1980년대는 산업화 속에서 인간의 삶은 존중받지 못한 시기였죠. 사람들은 모두 일에 매몰되었고, 아파트는 건설되었지만 정작 그 안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지는 못했죠. 일 역시 개성이 있는 일이 아닌 획일화된 일이었고, 당시 대중들 대부분은 부품 취급을 당했습니다. 이 시기에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가 많이 나왔음을 생각하면, 이 시 역시 이러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쓰여졌다고 볼 수 있죠.

 

 

3. 화자가 느낀 자신은 플라스틱 물건 같다

화자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면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플라스틱 물건은 화자가 좌절, 절망, 삶에 대한 부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죠. 이 플라스틱 물건과도 같은 삶은, 가치 없이 일회용품과도 같은 삶을 의미합니다. 현대 문명에서 획일화된 삶을 살고 있는 화자, 큰 가치도 없어보이는 자신의 삶이 마치 일회용품인 플라스틱 물건과도 같다는 것이죠.

 

이럴 때 화자는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털보네 대장간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사라졌습니다. 털보네 대장간은 어떤 공간일까요?

 

 

4. 오랜 시간을 공들여서 하나하나 도구를 만드는 대장간의 정

시의 중간에는 대장간에서 만드는 물건들과, 그 과정이 언급됩니다. 낫은 불 속에서 쇠를 달군 다음,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정성껏 갈아서 태어납니다. 이러한 긴 과정을 거쳐 나오기에 낫은 튼튼함을 유지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낫, 호미와 같은 물건은 즉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서 만들어지고, 각각이 고유한 역할을 오래 해 내는, 가치 있는 존재'를 상징하는 매개체죠. 이러한 물건을 만드는 대장간은 '가치 있는 삶을 만드는 전통적인 삶의 공간'입니다.

 

화자가 이 대장간을 찾는 것은 플라스틱 물건과도 같은 자신을 가치 있는 낫과 호미 같은 것으로 바꾸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장간은,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 단지로 인해서 사라졌죠. 그 자리를 채운 아파트들 역시 플라스틱 물건처럼 획일화되어 있고 똑같은 모습으로 지어졌습니다. 

 

 

5.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 하며 마무리되는 시

이러한 기계적이고 비인간회된 삶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화자는 부끄러워합니다. 하여 자신을 '똥덩이'라는 직관적인 표현으로 묘사하죠. 해우소에서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화자는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고 합니다. 앞에서 낫과 호미처럼 대장간 벽에 걸려 있고 싶다고 말한 것과 연결되며, 마지막은 '가치 있는 삶을 소망하는 바람'으로 마무리됩니다.

 

 

♣ 개인적인 감상

자신을 똥덩이라고 표현하는 다소 충격적인 비유. 그만큼 시인은 당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졌을 것입니다. 시인 역시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러한 문제 속에서 기계처럼 지내야 하는 존재였기도 했겠죠. 오늘날에는 이러한 문제가 조금은 더 나아졌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의 비인간화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이에 상관 없이 자신의 현재를 기준으로 때로는 옛날의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 그리운 이유는, 그때의 물건과 풍경에서 더더욱 인간적인 감정을 많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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