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 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1. 비극적 현실에 대한 비판, 최승호 시인
최승호 시인은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를 민중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시를 써 왔습니다. 대표작 <아마존 수족관>은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엿본 내용을 담은 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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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아마존 수족관> (시 수집 96)
, 최승호 아마존 수족관 집의 열대어들이 유리 벽에 끼어 헤엄치는 여름밤 세검정 길 장어구이집 창문에서 연기가 나고 아스팔트에서 고무 탄내가 난다 열난 기계들이 길을 끓이면서 질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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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최승호 시인의 시적 경향은 첫 시집 <<대설주의보>>에서부터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이때의 시는 비극적인 현실에 한 가지 구체적인 면이 더 추가됩니다. 바로 군부독재입니다. <<대설주의보>>는 1983년, 즉 전두환 정권 시기에 발간된 시집입니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대해 많은 저항시들이 쏟아졌고, 이 <<대설주의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표제시이기도 한 <대설주의보>를 감상해 보죠.
2. 백색의 계엄령
시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마을의 풍경과 눈을 피하는 작은 생명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배경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당시 군부독재정권 치하의 시련의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2연 마지막의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이라는 말로 말이죠.
백색의 계엄령이라는 말을 통해서 시인은 시에서 내리는 눈이 군부독재하의 시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폭설은 그칠 줄 몰라서 산은 온통 백색이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철차 한 대도 오지 않는다는 것은 즉 이 군부독재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을 의미하죠. 그리고 이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날아다니는 굴뚝새가 있습니다.
3. 눈과 솔개를 피해 다니는 굴뚝새
시에서의 굴뚝새는 독재정권의 눈에 거슬리지 않고 쥐죽은 듯이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우리 민중을 의미합니다. 굴뚝새를 숯덩이만하다고 표현한 것은 일단 살아있는 생명이기에 불을 내뿜을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눈에 의해서 불이 꺼져가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숯덩이는 불을 낼 수 있지만 하나로는 금방 꺼져 버려 재로 날아가게 되죠. 이러한 위태로운 대중들의 삶을 '숯덩이만 한 굴뚝새'로 표현했습니다.
이 굴뚝새는 뒷간에 몸을 감춥니다. 솔개, 즉 독재정권을 유지하려는 앞잡이 세력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렇게 피한 곳은 자연 속 공간도 아니고 겨우 좁디좁은 뒷간입니다.
4. 눈보라의 군단, 군사정권의 상징
마지막 4연에서는 산짐승처럼 몰려오는 눈보라의 군단을 묘사합니다. 군단은 군대의 큰 집단 중 하나입니다. 눈보라를 군단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 정권이 군사정권이었기 때문이죠. 이러한 군사정권은 자연에서 기개 있게 자라는 소나무 가지들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탱크를 몰고다닐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시인은 다시 '눈보라가 내리는 / 백색의 계엄령'의 반복을 통해서 강조합니다. 결국 시는 군부정권 아래의 시련의 시기를 강조하며 끝나죠.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이 눈이 내리고, 작은 생명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1980년대 민중들의 삶이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면을 비판하고, 봄이 오게 하기 위하여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숯이 모이고 모이면 쉽사리 끌 수 없는 불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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