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모아모아 시

곽재구, <사평역에서> (시 수집 54)

by 알쓸수집가 2023. 5. 28.
728x90
반응형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이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 곽재구 시인의 등단작

곽재구 시인은 1954년 광주 출생입니다. 곽재구 시인은 6.25 직후에 태어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몸으로 느끼며 자랐습니다. 당시는 정치/경제적으로 많은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던 시기였지요. 당시 민중들은 정치적으로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싸워왔으며, 경제적으로는 나라를 잘 사는 나라로 만들자는 독재정권의 메시지하에서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고 일만을 반복했습니다. 참으로 고달팠죠.

 

이러한 대중들의 희생과 애달픔은 많은 문학인들에 의해서 조명되었습니다. 당시의 문학인들은 이러한 문학작품으로 민중들을 위로하거나 개혁의지를 고취시키거나 하는 등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곽재구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현실의 폭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민중을 대변하는 시들을 많이 쓰며 당시 민중들의 고달픔을 시로 위로하고자 했죠. 그의 등단시인 <사평역에서>를 읽으면, 시인이 시 창작 활동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곽재구 시인이 더 알고 싶다면?

https://c-knowledge.tistory.com/24

 

곽재구, <새벽 편지> (시 수집 4)

, 곽재구 새벽에 깨어나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c-knowledge.tistory.com

 

 

2. <사평역에서>

이 시는 총 27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제 사평역은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남광주역과 남도의 회진포구를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하철역에서 이 시를 읽으면, 배경은 달라도 시의 등장인물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를 쉽게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시의 등장인물들처럼 힘든 일상을 반복하잖아요.

 

시의 공간적 배경은 '사평역'이며, 시간적 배경은 '막차 시간'입니다. 한밤중, 그렇게 기다리는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막차는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안식의 장소인 집으로 데려다주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 마지막 수단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화자가 처한 상황이 고달픈 상황임을 암시합니다. 대합실 밖에는 눈이 쌓이고, 톱밥 난로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유일한 존재로 온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톱밥 난로의 따뜻함은 정겨움을 주기보다는 애달픔과 서러움을 부각시킵니다. 추운 겨울, 고달픈 일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열차를 막연히 기다리며 난로로 추위에 버티는 상황입니다.

 

이후 화자는 시선을 돌려 주위 사람들을 살펴봅니다. 5~6행이 주위의 모습이죠. 몇은 졸고 몇은 쿨럭이는 모습. 지치고 고단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는 '그리웠던 순간'을 떠올립니다. '그리웠던 순간'은 삶의 고단함을 잊게 하는 행복한 과거로, 이를 떠올리며 화자는 톱밥을 불빛 속에 던집니다.

 

 

3. 삶의 어려움을 토로할 수 없었던 당시, 모두가 어려웠다

이후에는 주변인들의 모습을 바탕으로 당시 민중들이 겪었던 삶의 애환이 그려집니다.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 모두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한 사람들이지만 차갑게 얼은 손바닥을 녹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두 힘듦을 불평하고 싶고, 고단함에 쓰러지고 싶고, 좌절감에 포기하고 싶고, 울분을 토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목소리가 소위 '세상 물정 모르는 애가 하는 소리'였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모두 침묵해야 했죠. 이러한 모습이 9~16행에 걸쳐서 표현되며 당시에 힘듦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묵묵히 자기 일만을 했던 민중들의 어려움을 대변합니다.

 

몸은 피곤해서 기침만 나오고, 그 몸을 달래기 위해 쓴 담배만 피우는 사람들. 그들의 눈앞에는 눈이 계속 쌓이고 그 모습을 지켜봅니다. 서정적인 분위기를 그려내어, 당시 민중들의 애환이 부각됩니다.

 

 

4. 우리 미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사람들은 멍하니 눈을 바라보며 열차를 기다립니다. 이윽고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죠. 22~23행은 '시간이 지나며 삶의 감정들이 가라앉음'을 의미합니다. 낯설음, 뼈아픔 모두 눈에 덮혀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울분은 시간이 지나며 다시 가라앉았다, 또다시 일어남을 반복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애달픈 모습을 보며 화자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25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자는 다시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눈물을 던집니다. 

 

 

이 시는 이렇게 늦은 밤, 귀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그려낸 시입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집에 빨리 가서 눈을 감고 영원히 잠에 빠지고 싶다는 무미건조함만을 드러내죠. 어떤 불평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얼굴이지만, 마음에서는 좌절, 애달픔, 외로움이라는 감정들이 요동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모습을 통해 당시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사는 소시민들의 애달픔'을 노래하고자 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