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달다>,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1. 정호승 시인의 사랑시
정호승 시인의 시는 외로운 존재를 어루만지는, 힘이 되어주는 그런 작품입니다. 오늘의 시 <풍경 달다>는 사랑을 다룬 짤막한 시로, 이 역시 사랑하는 존재를 어루만지고자 하는 정호승 시인의 따뜻함이 묻어나오는 시죠. 사랑의 강한 정열이 팍 솓아나오지는 않지만, 담백하고 순수하면서도 사랑이 물씬 묻어나오는, 그런 시입니다.
2. 운주사 와불은 무엇인가?
정호승 시인은 이 시를 운주사 와불을 보고 떠올렸습니다. 운주사 와불은 세계적으로도 그 형상을 찾아보기 힘든, '누워있는 부처님상'입니다. 두 기의 부처님상이 누워있는데 이런 기이한 부처님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여태까지 느껴왔던 불교적 감상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일깨워주죠.
이 와불은 정확히 남북을 향하고 있으며, 둘이 함께 누워있습니다. 와불이 일어서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이 있습니다만, 운주사가 폐사가 되었기에 와불이 일어설 힘을 일찍이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겠군요. 이렇듯 운주사는 다른 절터와는 확연히 다른 신비로운 감상을 주는 곳입니다.
3. 두 와불에서 엿본 사랑
정호승 시인은 이 와불을 보고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누워서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결코 둘은 떨어지지 않았죠. 천 년의 세월 동안 서로를 감싸며 일어날 날만을 위해 계속 고통을 참았을 불상을 보며 정호승 시인은 '사랑 역시 이 와불처럼 시련이 있어도, 변함없어야 한다'라는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지었습니다.
시는 8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입니다. 운주사 외불을 뵙고 돌아오는 길, 화자는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았습니다. 이 풍경은 화자와 사랑하는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는 단어입니다. 먼 곳에서 바람이 불면 풍경이 흔들려 풍경 소리가 납니다. 이를 시인은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나'라는 대상이 나타나고, 이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즐겁게 흔들렸다는 것을 의미하죠.
풍경 소리는 맑고 깨끗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때의 흔들거림도 거칢보다는 상쾌하고 설레임이 가득한 흔들거림이죠. '풍경 소리가 울리는 것' =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과 동일시되어, 깨끗하고 조용하지만 한없이 울리는 사랑의 벅찬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
이 시를 통해 운주사 와불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운주사의 모습은 정말 신비롭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이더군요. 오랜 풍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두 와불. 그럼에도 장엄한 얼굴로 서로 붙어 결코 떨어지지 않을 두 와불. 이 모습을 실제로 본 시인은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사랑'을 떠올린 것 같습니다. 이 시의 시작으로 운주사 와불이 아닌 다른 불상이 나왔다면 그만큼의 강렬함은 사라졌겠지요. 정호승 시인의 시적 감각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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