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 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1. 동화 같은 쓸쓸함, 백석 시인의 시
저는 백석 시인의 시를 보면 '동화 같은 스토리에 쓸쓸함이 묻어난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백석 시인의 시는 이 이전의 시들과는 달리 아름답고 토속적인 언어를 기반으로 하여, 하나의 서사를 그려내는 듯합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으면 '참으로 아름다운 시구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물론 이 시에서는 무조건적인 아름다움만이 드러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쓸쓸함이 부각되죠. 하지만 시를 읽으면 '아름답다'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백석 시인의 시는 언어적 매력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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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 수집 9)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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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백석 시인의 대표적인 초기작품인 <여승>을 알아보겠습니다. 백석 시인의 초기 작품은 '풍경, 사람, 사물 등 어떤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를 담담하고 토속적인 시어로 표현하는 경향'을 띱니다. 이 시는 그 대표적인 시죠. 또한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시는, 당대 우리 민족의 아픔까지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2. 일제강점기 치하 가족의 해체, 그리고 불교에 입문하려는 여성의 아픔
이 시는 한 여승의 합장, 이를 바라보는 화자의 관점에서 시작합니다. 가지취는 산나물의 한 가지로, 여승이 불교에 귀의하여 산속 생활을 한 지 시간이 꽤 지났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쓸쓸한 낯은 옛날 같이 늙었고 이를 화자는 서럽게 바라봅니다. 바로 이 여승의 고통의 삶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 여성은 일제강점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던 당시 우리 민족을 대변하는 여인입니다. 2행에서 이 여인과의 첫만남 장면이 나옵니다. 여인은 옥수수를 팝니다. 여인의 행색을 알 수 있는 단어는 '파리한'입니다. '파리하다'의 뜻은 '몸이 마르고 낯빛이나 살색이 핏기가 전혀 없다'입니다. 즉 여인의 고달프고 가난한 행색이 직접 드러나는 단어이죠. 여인은 딸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해 괜히 야단만 치게 되고, 이런 자신의 모습에 애달픔을 느껴 울음을 터트립니다.
이는 당시 우리 민족,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현실이었습니다. 남편들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자신은 남은 아이들과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야 했죠. 빛은 보이지 않았고 아이들을 먼저 먹이느라 자신의 몸은 야위어 가고, 그럼에도 아이들이 원하는 것 하나 들어주기 힘든 현실이었습니다. 화자는 이러한 여인의 옛 모습을 보며 서러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3연에서도 여인의 삶은 고통이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 사이에 유일한 딸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3연에서의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도라지꽃을 찾아갔다'라고 함으로써, 그 비극적인 슬픔을 더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가족은 해체되었고, 의지할 곳마저 잃은 여인은 좌절할 따름이었습니다. 이 모습 역시, 당대 우리 민족의 모습입니다. 백석 시인은 이러한 우리 민족의 수난, 그리고 당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담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어두운 면을 비판하고 있었죠.
3. 산꿩도 슬프게 울던 날, 여인은 부처님을 따르다
마지막 4연은 여인의 삭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날, 산꿩도 서럽게 울었습니다. 산꿩은 여인이 투영된 동물로, 산꿩의 울음은 여인의 울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행에서 여인은 삭발을 하며 눈물을 같이 떨굽니다. 이는 불교에 들어가면서 그동안의 삶의 고통을 다시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음을 의미하겠죠. 결국 시인은 이러한 여인의 인생을 회상식으로 보여줌으로서 당시 우리 민족의 길게 이어진 고통을 서럽게 드러냈습니다.
♣ 개인적인 의견
어릴 때 이 시를 봤을 때는 여승의 마음이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시를 암기의 대상으로만 느꼈죠. 하지만 나이를 먹은 지금, 여승의 모습에서 서러움을 같이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인생의 굴곡을 그만큼 더 겪어봤기에, 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승의 고통스러운 삶이 더 공감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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